[신년설교]
기쁨의 푯대를 향하여~
빌립보서 3:10~16
서론
금요일에, <아름다운동행> 강서판 편집에 동역하는 감리교 목사님이 피자를 여섯 판 보내왔습니다. 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먹으려고 이틀을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한 판씩 꺼내 같이 먹읍시다. 먹을 준비가 되었나요? 첫 번째 피자는 얼굴피자~ 가슴피자~ 어깨피자~ 주름피자~ 허리피자~ 형편피자~
이런 피자선물에 한 판을 더 붙입니다. 말씀피자~
이렇게 피자로 잘 대접했는데 한구석에 모여 제발 엉뚱한 말썽피자판 벌리지 마세요~ 2020 경자년 얼굴도 펴고 가슴도 펴고 어깨도 펴고 주름도 펴고 허리도 펴고, 중요한 것! 형편도 펴지는 해가 되세요! 그러면 어떤 피자를 잘 먹어야 하겠어요? 그렇지요! 말씀피자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로 아시아로 가려던 꿈을 접고 억지로 지중해를 건너 처음에 만난 루디아와 옥중에서 고생한 대가로 얻은 열매 교회이기에 여러 교회를 개척했지만 특별히 빌립보교회에 대한 애정이 깊었습니다. 그만큼 빌립보교회가 바울에게 잘 했습니다. 문제는 목회자에게는 잘했는데 교인들 간에는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기쁨을 잃어버렸고 분위기가 갈아 앉아버린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판단하는가, 빌립보서는 ‘기쁨’ ‘기뻐함’이라는 단어가 16회 나옵니다.
1:4, 기쁨으로…
18절, 기뻐하고 또 한 기뻐하리라.
25절, 기쁨을 위하여…
2:4, 기쁨을…
12절, 기쁘신 뜻대로…
17절, 기뻐하고… 기뻐하리니…
28절, 기뻐하게 하며
29절 모든 기쁨으로…
3:1, 기뻐하라…
4:1 기쁨이요 4절, 항상 기뻐하라… 기뻐하라
10절, 크게 기뻐함은
18절, 기쁘시게…
빌립보서가 4장밖에 되지 않는데 기쁨이라는 단어가 16회가 나왔다면 빌립보교회는 무엇에 결핍했나요! 기쁨입니다! 왜요? 전체적인 내용을 보니 교만과 경쟁, 시기와 질투가 교회 안에서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특히 4장 2절의 유오디아와 순두게 여집사나 여권사들로 파당을 이루어 교회가 서로를 적대시하다보니 교회 공동체가 기쁨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교회에 바울은 기쁨피자를 배달합니다. 기뻐하라~ 얼굴이 그게 뭐냐? 얼굴피자! 주름피자! 어떻게 해서? 기쁨피자들 먹어라! 그거잖아요? 성경 너무 어렵게 해석하려 하지 마세요!
바울은 얼굴도 펴고 주름도 펴고 형편도 펴지는 피자판의 한 해가 되려면 어떤 말씀피자를 주문하고 먹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두 마디로 딱 요약합니다.
13절,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우리가 기쁨의 한 해가 되려면 무엇을 잊어 버려야 할까요?
우선, 발목을 잡는 죄(罪)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창2:31), 하셨습니다. 창조의 완전성 완벽성입니다. 미완성이 아니라 100% 완성된 피조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 걸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생육하고 번성! 땅에 충만! 이 말씀에 성공학! 행복학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성공DNA 행복DNA, 번영DNA가 심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죄의 바이러스는 성공DNA 행복DNA, 번영 DNA를 모두 파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모세처럼 인생의 연수가 70이며 강건하면 80이라도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탄식을 하며 고생고생하다 끝나는 것입니다. 죄(罪)가, 죄인신세가 이런 구차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세상으로 성육신하셨습니다. 우리 영과 육신의 죄성을 없애고 성공DNA 행복DNA, 번영DNA를 회복시켜 주려 오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주님께서 죄의 멍에를 벗기시고 주려는 것은, 풍성! 번영! 행복입니다. 즐거움이고 기쁨입니다. 그 일을 위해 주님께서 하신 1번이 죄를 사하여 주신다, 도말하여 주시는 일입니다.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3-15)
여기 ‘도말’은 ‘페인트칠한다!’, ‘문질러 닦아 낸다’, ‘박박 긁어서 없앤다’,
요한도 말했습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우리 죄를 사하시며…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10)
우리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그 죄를 도말하여 주십니다. 도말은 일시적으로 죄를 이동시켰거나 보관해 두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으로 끝장처리를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죄를 일단 회개하였으면 잊어버리고 다시는 그 죄 때문에 아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이 잊으신다 하셨으니 우리도 잊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하셨으니 나도 나를 용서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성장이 제대로 됩니다.
바울은 사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된 행동을 했습니까? 예수쟁이들이 미워 잡아가두고 죽이기 다반사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죽음에 바울의 책임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거를 지니고 회심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얼마나 그 일로 자책감, 수치, 죄송함, 낯 뜨거움을 느꼈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고 십자가 능력의 보혈로 용서 받은 후에는 싸악! 잊어버렸습니다. 내면에서 죄와 의가 싸우는 갈등은 말하지만 용서받은 과거에 대해서는 뻔뻔할 정도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이고 그래야 신앙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이라는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여인이 남편과 크게 싸웠습니다. 남편의 출근 후에 화가 끓어올라서 ‘사고 나서 어디 혼 잠 나봐라~’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남편도 분을 참지 못하고 식식거리며 운전하다 사고 나서 죽었습니다. 아내는 매일 죄책감에 살다 미쳤습니다. 과거에 대한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자기의 과거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때나마 몸 쓸 사람 다윗이 말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그래요! 죄책감과 수치스러움이 기쁨을 앗아갑니다. 예수 믿을 때 제대로 회개했으면 구원을 위협하는 죄는 땡! 처리해야 합니다. 더 이상 기억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얽매어 아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게 되고 기쁨의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실수도 잊어야 합니다. 실수하기에 사람이고 용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언젠가 과학자들에게 인류의 발명품 중에 가장 위대한 것 두 가지를 말하려 했더니 뜻밖에도 피임약과 지우개를 꼽았습니다. 연필에는 항상 지우개가 있습니다. 연필 사용에 실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볼펜도 지우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도말해주는 역할만 아니라 생활의 허물도 지워주시는 지우개입니다. 그러기에 과거에 실수한 것을 자꾸만 회상하고 기억하고 끄집어내어 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 살인자 아닙니까? 다윗은 치사한 죄와 무서운 죄, 이중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나 다윗은 원통한 마음으로 죄를 회개한 후에는 그 허물을 끄집어내어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허물을 용서하여 주신다 하셨으니 과거를 잊고 하나님의 일에 진력했습니다.
억울하게 당한 것도 잊어야 합니다. 억울함에 발목 잡혀 있으면 뒷걸음질을 합니다.
요셉의 위대함이 단지 이집트 총리가 아닙니다. 너그러움과 관대함과 용서! 그게 요셉의 위대함입니다. 자기를 죽이려 하고 팔아버린 형제들! 얼마나 억울하고 괘씸합니까? 13년을 고난과 시련의 세월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형제라도 무참하게 밟아야 합니다. 성폭행으로 누명을 씌우고 옥에 갇히게 한 보디발의 아내는 어떻습니까? 은혜도 잊어버리고 2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한 술관원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모두 용서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요셉의 용서가 있었기에 12명의 형제들은 하나도 궐이 나지 않고 12지파를 이루며 대민족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용서만이 개인이든 국가이든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딤후 4:14에서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자기에게 해를 많이 끼쳤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예수님을 믿다 배교한 이단자로 바울이 재판받을 때에 불리한 증언(證言)을 한 사람입니다. 생각할수록 괘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께서 행한 대로 갚게 하고 보복하지 않겠다 선언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지 자신은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거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미래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억울함이 있어도 잊어야 합니다. 나 자신의 감정을 위해 내 마음의 옥에서 풀어 내주어야 합니다.
원숭이들은 싸우다 엉덩이를 들면 항복표시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습니다. 개가 꼬리를 내리면 항복입니다. 개도 공격하지 않습니다. 짐승도 항복하면 싸우던 것을 잊어버립니다. 사람도 용서를 빌면 끝내고 잊어야 합니다. 그걸 한(恨)으로 품고 있으면 독이 되고 믿음의 싹을 잘라버리고 갉아 먹히게 됩니다. 그런 한을 품고 믿음이 자라버리면 병든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독소가 되고 화평을 깨게 됩니다.
내가 쌓아올린 업적도 선행도 잊어야 합니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13절,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한 일’은 선행이고 자랑이고 상급을 받을 일입니다. 그것도 잊어버리라 합니다. 거기에 연연하면 있는 자리에서 만족해서 더 이상 성장이 없이… 남들이 알아주면 교만해지고 몰라주면 섭섭병에 걸립니다. 그러면 죽은 믿음이 되고 죽은 믿음에 기쁨이 생길 수 없습니다. 이거 다 잊고 앞만을 바라보면서 가야 합니다. 그래야 큰 믿음이 되고 풍성한 삶이 됩니다!
결론
아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군대 다녀온 아들이 형이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어떤 자세로 제가 세상을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가 몇 마디 했는데, 10살 터울인 형에게 또 묻습니다. 그러자 형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살아보니 기쁨은 거창한 것에 있지 않고 작은 것, 사소한 것에 있더라. 그저 고마움은 간직하고 미안함은 표현하며 살거라!”
고마움은 간직하고 미안함은 표현해라!
어떤 명언보다 어떤 교훈보다 마음에 와 닿은 말이 아닙니까? 그래요, 고마움은 과거든 현재이든 잘 간직하고 사세요! 미안함은 간직하지 말고 표현하세요! 미안하다고… 미안했다고… 그러면 기쁨이 회복됩니다.
금년 한해! 피자선물 많이 받으세요! 얼굴피자~ 가슴피자~ 어깨피자~ 주름피자~ 허리피자~ 형편피자~ 배달합니다! 한 판을 더 주문했지요? 말씀피자! 말씀피자판을 여세요!~
14절,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달려가세요!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찌하셨을까?”
그게 기준이고 답입니다! 그러면 기뻐하는 풍성한 생애가 될 줄 믿습니다. 그리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뭐 별거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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