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만이 교회이다!
사무엘하 9장 1∼8절
서론
(실없는 예화) 포항문어가 부산 멸치를 찾아 사돈을 맺자고 했습니다. 부산멸치가 거절하기를 왈~!
“우리 멸치가 뼈대 있는 가문인데 뼈도 없는게 어찌 사돈 맺자 하시오?”
한방에 거절당한 포항문어가 목포를 찾아 새우에게 사돈을 맺자 했습니다. 새우집안 왈~
“우리집안이 수염이 있는 양반집인데 머리카락도 없는 게 어디 사돈 맺자 하느냐?”
낙심한 포항문어, 머리라도 식힐 겸 울릉도로 놀러갔다가 꼴뚜기와 눈이 맞아 결혼해서 낳은 자식이 오징어랍니다. 수염이 없다 얕잡아 보이고, 뼈대 없다 퇴짜 맞고⋯ 체념 상태에서 꼴뚜기 만나 오징어를 낳았는데 그만하면 결혼 잘한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울릉도오징어들은 결혼도 변변하게 못했던 조상 탓을 하지 않고 ‘울릉도오징어’라는 나름대로의 브랜드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뼈대가 있든 없든 수염이 있든 없든 꼴뚜기 같은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꼴뚜기 목사가 포항문어와 같은 여러분을 만나 행복하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주간에 <하나님의 사람은 은혜로 삽니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제목도 아니고 새삼스러운 내용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 제목을 읽었을 때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은혜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브랜드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고 살아왔나요? 그러나 젊었을 때 들었던 은혜와 요즘 듣는 은혜는 같은 단어라도 울림이 달라요. 나이가 들어가니 약해지는 것인지 믿음이 원숙해져서 그런지, 은혜라는 말이 참 좋아요! 그래서 다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면 은혜의교회라고 짓고 싶어요!
요즘 세상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은혜가 마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십니다. 그랬더니 몇 사람이 무엇이라 하는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회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가 말라버린 사람입니다. 은혜가 말라버리니 회당에서도,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에서도 좋은 일을 비난하고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비은혜의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신자가 신자다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진정 교회다움이고 신자다움입니다. 은혜가 없는 교회, 은혜가 없는 목회자, 은혜가 없는 중직자는 비은혜의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비은혜로 교회가 채워지면 교회는 교회다움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말합니다. “웬만한 일에는 세상이 교회 못지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일은 굳이 교회가 아니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줄 수 없다!”
그래요! 교회다우려면 교회는 은혜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인다우려면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이 스펙을 쌓을 때 교회는 은혜를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가 다스리는 은혜의 왕국이요 예수님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최고봉입니다. 은혜는 죄인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는 경건과 거룩한 삶을 유지하게 하는 힘입니다. 은혜가 임할 때 교회가 교회답고 은혜가 빠져버리면 교회는 종교단체로 전락하게 됩니다.
노아를 보세요. 노아와 가족은 대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창 6:8). 하나님의 은혜가 죄에서 보호했고 대홍수심판에서 구원해 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술에 취해 은혜의 옷을 벗어버렸습니다. 은혜의 안전핀이 빠진 것이지요! 노아는 벌거벗고 드러눕습니다! 아들 함이 하체를 흉보았음을 알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것이 어제까지 성자의 모습입니다. 은혜가 떠나가면 별 사람 없어요! 성자도 은혜가 떠나면 죄인이 되고 죄인이 은혜를 받으면 성자가 됩니다. 비은혜로 신앙생활하면 똑똑한데 내 기준에서 남을 대하니 뭐가 나와요! 서로의 잘잘못만 가리려 하다보면 인간성이 거칠어집니다.
비빔밥에 나물과 밥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까칠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기름이 있어야 잘 버무려지고 맛이 납니다.
사람도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있어야 너그러워지고 배려가 있고 수용성이 큽니다. 은혜가 있어야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불쌍하게 여깁니다. 은혜가 있어야 변화를 일으킵니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서만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에 은혜와 비은혜에 대한 상반된 두 인물이 나옵니다.
먼저 다윗입니다. 은혜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스승과 제사 사이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통치철학에도 은혜가 중심이 되어야 왕은 성군이 됩니다. 왕이 된 다윗은 숨어있던 사울 손자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데려옵니다. 므비보셋은 두려움에 떱니다.
7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왕위에 오르면 정적(政敵)과 일가 친족을 죽이는 것은 일반적 관례입니다. 므비보셋은 그 같은 관습에 따라 다윗 왕이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염려하는데 공포수준입니다. 왜 안 그러겠어요? 므비보셋은 친할아버지 사울이 다윗에게 했던 ‘몽리’를 압니다. 할아버지는 못할 짓을 많이 했어요! 다윗을 갖고 놀았고 모욕했고 살인까지 시도합니다. 그러다 사울왕과 아버지 요나단, 두 삼촌왕자도 동시에 전사합니다. 사울정권이 몰락하자 신하들이 떼거지로 다윗에게 붙었습니다. 누구도 므비모셋을 보호해 주지 않고 변호해 줄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떱니다.
므비보셋이 떠는 까닭! 다윗이 얼마나 은혜의 사람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왜 부릅니까?
1절,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3절,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7절,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주려고 찾아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세상 왕으로 다윗을 이해합니다. 보나마나 사울정권의 씨를 말려 후환을 막으려는 것으로 알고 두려워합니다.
므비보셋! 지체장애인입니다. 보통 장애가 아닙니다.
3절, ⋯다리 저는 자니이다⋯.
므비보셋은 다섯 살 때에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급히 도망하던 유모의 팔에서 떨어져 불행히도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4:4). 이를 두고 사울의 신하였던 시바는 므비보셋의 이름 대신에 다리를 저는 자라고 말합니다. 시바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전형입니다. 그가 사울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 정권에서 많은 것을 누렸을 거예요!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말을 갈아탑니다. 다윗 정권에 찰싹 달라붙은 것입니다. 다윗이 그를 쉽게 대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권력 가까이 있습니까? 그러나 새 권력은 얻었지만 은혜의 사람은 아닙니다. 은혜를 모르는 시바에게 므비보셋은 ‘절름발이’에 불과했습니다.
얼마든지 이름을 불러줄 수도 있잖아요? “므비보셋이라는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아니면, “사울의 손자 한 명이 숨어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의도적으로 다리를 저는 자라고 폄하합니다. 그 말은 사울정권은 죽은 정권이고 겨우 목숨을 건진 손자도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기에 제가 혹시 그 편에 있을 거라는 의심은 버리십시오! 하는 자기방어기제 발언입니다. 은혜가 없기에 그럽니다.
므비보셋 자신은 어때요? 다윗이 왕궁으로 불렀다는 전갈을 받고 자신을 뭐라 부릅니까?
8절, “⋯죽은 개 같은 나를⋯”
아무리 정권이 무너졌다 해도 그는 왕자입니다. 왕이 될 남자입니다. 유모의 팔에서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되었지만 당당히 자기 이름은 므비보셋입니다. 아버지가 이어준 그 이름은 왕자의 이름이요 왕이 될 승계자의 자신만만한 이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제가 므비보셋입니다.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다윗의 은혜를 몰랐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주시는 은혜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은 개’로 자처합니다. 그는 다윗과 자신과의 관계를 은혜의 원리로 보지 않고 통치의 원리로 해석한 것입니다. 다윗도 일반 왕과 같은 부류로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다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을 봅니다. 그는 그 사람의 장애를 보지 않고 인격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릅니다!
6절,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에 다윗은 ‘므비보셋이여’ 이름을 불러줍니다. 이름만 그렇게 불러준 것이 아니라 11절, ‘왕자 중 하나처럼’ 왕자로 대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대하는 아름다운 인품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남에 대한 호칭에서부터 다윗의 배려가 보입니다.
우리가 이런 면에서 너무 비은혜의 모습을 보입니다. 함부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거나 직함조차 생략하거나 아주 못된 사람으로 평가절하합니다.
사랑의교회가 이런저런 이유로 여론의 도마에 올랐을 때 내로라하는 김아무개 목사님이 오목사님을 두고 SNS에 ‘회개하라’, ‘별 미친 놈 다 보겠네’라 했습니다. 별 미친 놈! 목사님이 이리저리 허물이 있을 수는 있지만 10만명 가까이 담임하는 목사님에 공개적으로 ‘별 미친 놈’이라는 것은 사랑의교회에 대한 모욕입니다. 사랑이 없는 정죄! 은혜가 없는 정죄! 그건 무비보셋이라는 이름이 엄연히 있음에도 다윗에게 아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옛주군의 손자를 폄하하는 시바와 같은 졸장부의 모습입니다. 비은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남들에 대한 호칭에서부터, 그를 소개하는 말 한 마디에서 은혜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 사람의 안 좋은 신체적 특징을 너무 쉽게 말해버리고 그 사람의 아킬레스건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일을 한다면 아무리 입에 은혜라는 말을 달고 산다 해도 그 사람은 은혜의 사람이 아니라 비은혜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므비보셋! 그는 더 이상 다리를 저는 자로 호칭되어질 사람이 아닙니다. 당당히 왕자와 동등한 신분입니다. 그에게 좋게 말하려는 사람들은 눈치를 보아가며 왕자님! 하고 불렀을 것입니다. 13절, 그는 왕과 같은 상에서 식사를 했기에 왕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정체성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더 이상 외적 특징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하여 정해집니다.
이러한 은혜의 기초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다윗이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에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푼 것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인하여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자녀의 복을 주십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행복한 자존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로드빌과 같은 외지에서 살아가는 마이너리그 루저와 같은 삶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자꾸 나오라고 합니다. 당당한 이름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니고 살아야 하는 정체성인 것입니다.
결론
보스턴에 사는 한 청년이 재벌회사 스트로사 사장 바텐에게, 워싱턴에 소매상을 차리려는데 2만 불이 필요하다고 차용을 요청했습니다. 바텐은 그의 인간됨을 믿고 무담보로 2만불을 빌려주었습니다. 10년 후 바텐의 회사는 7천만 5천 달러의 부채를 지고 망했습니다.
그때 그 소식을 들은 보스턴 청년이 7천만 5천 달러와 2만불을 들고 왔습니다. 2만불은 차용금이며 나머지는 담보 없이 빌려준 이자라고 했습니다. 양자 간에는 돈이 경제적 개념, 이자의 개념이 아니라 은혜의 개념이고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서로 고마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은혜를 주제로 한 복음송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므비보셋! 그는 사라져버린 정권의 후계자입니다. 왕궁도 없고 부모도 형제도 없습니다. 로드빌이라는 곳에서 숨어살았습니다. 이름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멸치도 뼈가 있고 새우도 수염은 있는데 그는 꼴뚜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꼴뚜기도 포항문어를 만나 오징어를 내듯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왔을 때, 다윗의 은혜의 언약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당당히 자기 이름을 회복하고 13절, 항상 왕의 상(床)에서 밥을 먹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그를 회복시켰고 다윗과 아버지 요나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그를 이름과 신분과 소유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므비보셋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 받은 사람의 모델이라면, 다윗은 자신을 은혜의 통로로 드린 사람의 전형입니다. 다윗의 은혜 가운데서 므비보셋은 행복한 왕자로 다시 일어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은혜 중심의 삶을 살되, 은혜가 왕 노릇 하도록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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