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닻내림’을 주목하라!
창세기 25장 1~7절
서론
지난주일(2017년) 저녁, 죽전에 있는 새에덴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새에덴교회는 우리보다 4년 뒤에 설립됐는데 근래 드물게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지상 10층에 지하 3층, 연면적 1만평에 4500석의 예배당, 교인 수는 4만 명 쯤, 주일학생이 3500명, 교사가 650명입니다.
사실 그동안 소목사님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입관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의 저서입니다. 예배당 건축 때 수천 평을 구입하려고 우리 땅이다! 영역표시를 위해 목사님도 장로님들도 원(圓)을 그리고 빙 둘러서서 개다리 오줌을 누었다는 것입니다. 상상이 가요?
설교 도중에 유행가도 몇 곡조 뽑는 등⋯ ‘약장사’ 같아요! 강단언어도 ‘조져버린다’ ‘죽여주네~’ ⋯원맨쇼 같은 내용들이 제 스타일과 안 맞아요! 그래서 새에덴교회의 부흥이 이해가 안 되고 이래서 한국교회가 자꾸 수준 미달이 아닌가,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2,3년 전부터 생각이 달라졌어요. 이곳저곳 신문에 나오는 글들이 달라져요. 그 분은 스스로의 목회를 '엿장수 목회'라고 해요. 사이다병 같은 폐품 가져오면 맛있는 엿으로 바꿔주는 엿장수처럼 상처입고 아픈 마음을 치유해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거룩한 엿장수가 되어 하나님의 기쁨과 생명력을 느끼게 할 수만 있다면 한없이 망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식사해보니 나름대로의 캐릭터가 분명해요!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대부분 일류대학에 외국유학파 인텔리, 점잖고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범접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은 전라도 남원에서 가난한 농부아들로 태어나 광주신학교 출신으로 학벌이 없어요. 스펙이 없는 거지요. 외모도 알잖아요? 본인이 말해요! 나는 흙수저라고⋯. 그러기에 체면이고 뭐고 꾸미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생긴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아무하고나 반말인지 모를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지난번에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조찬기도회 설교를 했는데, 꼭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대통령 누님! 고생 많습니다! 스스럼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분입니다.
설교가 끝나고 비서목사님과 함께 지하 1층까지 배웅해 주는데, 엘리베이터에서 큰 목소리로 으왁~ 하는 거예요! 모두 깜짝 놀랐어요! 장난 친 거예요! 대형교회 목사의 모습은 사라지고 익살스런 소년이 되는 거예요! 그런 모습에 오히려 교인들은 매력과 친분을 느끼는가, 봅니다.
세상은 이런 지도자를 원하는 것 같아요! 권위로 무장된 카리스마 목회자가 아니라 대형교회 목사님인데 유행가 부르고 장난 치고 원맨쇼 하니까 회중들이 강단의 설교가 내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꾸중을 받듯이 설교를 듣는데 익숙해 있다 망가지는 목사님 설교에서 자기들을 본 거예요! 흙수저 출신이 금수저처럼 행세하지 않는 그 순박한 삶에, 열정에 열광한 것입니다.
내가 왜 이리 길게 소목사님 이야기를 하는가, ‘사람을 보는 관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선입관 때문에 한 목사님의 장점이 얼마나 왜곡되이 전달되고 있을까, 한 사람이 단점이 얼마나 왜곡 과장되고 있을까? 그 사람을 딱 한 번 만났는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혹평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면서 내 인생성장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내가 책을 통해 만나는 소목사님, 기독교텔레비전 금요철야기도회 때 만나는 약장수 같은 목사님⋯ 나는 그분의 과거에만 매어있고 설교스타일에만 얽매어 비판하는 동안 그 분은 계속 성장했던 거예요! 이처럼 과거의 프레임에 갇혀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컬럼비아대학교 경영대학원 마이클 모부신 교수는 <판단의 버릇>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판단과 예측에서 버릇처럼 되풀이 하는 인지적 실수들을 다른 책입니다. 판단의 실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몫인데 오히려 똑똑이들이 더 많이 한답니다. 머리에 내재한 소프트웨어의 초기설정이 한 방향만 보도록 설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똑똑하니까 나처럼 생각하지 않고 나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틀렸다~ 그렇게 단정해 버리고 자라지 않는 자기 지식으로 판단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에 똑똑이들이 오히려 그릇된 판단을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며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닻내림 효과’라 합니다. 닻을 내린 배가 닻을 내린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듯 처음 접한 정보가 기준점이 되어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는 현상이 ‘닻내림 효과’입니다. 일종의 어림짐작의 기술로, 당연히 편향성을 띄게 됩니다.
내가 소목사님에게 갖고 있던 편견은 사역초기에 썼던 책에서 얻은 짧은 정보에 근거한 어림짐작입니다. 그게 닻내림으로 그를 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사님이 수박, 오이 행상을 해가며 생활비를 벌면서 '맨손, 맨몸, 맨땅' 소위 '3M'으로 오늘의 대형교회를 일군 그 열정과 시대를 꿰는 능력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눈도 그래요! 본문에는 아브라함 생애에서 어느 한 지점을 보여줍니다.
1절, 아브라함의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이해가 됩니까? 사라가 127세에 죽었으니 아브라함의 나이는 140세 정도⋯. 사라가 죽었을 때 애통했던 사람입니다(창 23:1). 그랬던 사람이 3년상(喪)이나 제대로 치렀을까요, 그두라를 후처로 얻어 아들만 여섯을 낳습니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어 찔끔, 본부인 사라에게서 이삭을 얻어 찔끔~ 원래 아브라함의 종자가 손(孫)이 귀한 집안인 줄 알았는데 그두라를 얻어서는 줄줄이 여섯을 낳습니다. 딸까지 하면 몇 명인가요? 175세까지 살았으니 새장가 들어 새부인에게서 자식을 낳은 것이 60세 초반이라고 쳐요~ 80까지 자식을 생산해 낸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는 내일모레가 100세이고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썼는데 20년을 병수발하던 아내와 84세에 사별합니다. 3,4년을 지내니까 적적해지고 90세가 되니 아내와 같은 여성이 있으면 재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비칩니다. 90세 된 할아버지가 남녀간의 로맨스를 하려고 제2의 여성을 생각하겠어요? 적적하니까 친구와 같은 부인,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90세가 넘어 젊은 여성에게 장가를 들어 줄줄이 자식을 생산했다고 상상해보세요! 남들 보기에도 존경심이 덜하겠고 자녀들이 얼마나 민망하겠어요? 아들 같은 이복들이 생기니~
지금 아브라함이 그래요, 140세 노인이 127세 아내를 떠나보내고 새장가 들더니 줄줄이 아들과 딸을 생산합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그 좋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깎아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흠을 갖고 아브라함의 일생을 부정해 버렸을 거예요!
그러면 ‘닻내림 효과’에 머뭅니다. 사람의 단점 하나를 물고 늘어져서 그 단점만을 부각시켜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도 나쁜 사람으로 믿도록 강요합니다.
이런 역사관이 한국사회에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친일(親日) 문제에서 이런 현상이 심각합니다. 얼핏 떠오르는 지도자들⋯ 육당 최남선,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거기에 서명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에 여러 공헌을 했기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분입니다. 그러나 조선인 유학생에게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글과 강연을 했기에 친일파로 매도됩니다.
이광수. 주요한, 김동환, 김동인, 모윤숙⋯ 반일운동을 했던 문학가들이지만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친일에 대한 몇 편의 시를 썼고 글을 남겼습니다. 후손들은 모든 좋은 것은 묻어버리고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과오를 수면 위로 부각시키면서 친일파로 매도합니다.
이원수. 제 신춘문예의 단독 심사위원입니다. 이 분 때문에 문단에 나왔고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 분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부인은 ‘오빠생각’을 쓴 김순애입니다. 이원수는 청년기에 반일운동을 했고 형무소에서도 살았는데 일제 말기에 친일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로 매도해 버립니다. 빙산의 일각의 흠만 과장하고 평생을 조국을 위해 애쓴 세월을 묻어버리는 것에 대해 얼마나 억울해 하겠어요? 친일을 친일적인 한 허물로 보지 않고 친일파로 인생 자체를, 그 가문 자체로 매도해 버리는 것입니다. 빙산의 나머지 부분의 반일행동은 외면하고!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그렇게 떠받들 위인이 못됩니다. 아브라함만 아니라 대(代)를 이어갔던 3대 족장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생애가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거짓말을 공식적으로 두 번이나 합니다. 아내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이스마엘을 얻고 모자(母子)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두라를 얻어 보란 듯이 6명이나 출산합니다. 믿음의 조상이 할 일입니까?
이삭. 대를 이은 허물을 보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아내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야곱. 야곱이야말로 뭐라고 변명도 안 되는 희대의 이기적인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3대족장을 어떻게 대우합니까?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 속이며 사는 일에 연연할 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창 20:9), 책망받을 때 하나님은 뭐라합니까?
창세기 20:7, 그는 선지자니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아브라함의 권위를 팍~ 올려주셨습니다.
이삭, 아버지처럼 아내를 누이라 속였다가 들통이 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책망합니다.
창세기 26:10,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나님께서 이삭의 체면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이렇게 말합니다.
26:28,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29절,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자니라.”
야곱은 어때요? 그의 인생 한 마디로 줄이면, 인생 개판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창세기 31:29,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눈이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대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은 어느 한 지점에서 중지를 합니다. 가장 안 좋은 지점에! 실수 지점에! 내게 못했던 지점에! 거기에 닻을 내립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변신했다 해도 그 사람의 생애에 고정된 나의 눈은 딱 한 점! 그가 내게 못해주었던 바로 그 한 점에 닻을 내리고 더 이상 다른 정보를 보지 않습니다.
그동안에 그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가? 어떻게 회개했는가, 얼마나 장점이 많은가, 거기를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편견에 사로잡혀서 그 좋은 장점들이 공동체에서 가려집니다. 그는 옛날도 지금도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삽니다. 결국 나만 자라지 않고 잘못된 정보 때문에 인간관계가 시원치 않게 되니 내 손해입니다.
하나님은 달라요!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함부로 닻을 내리지 않습니다. 계속 성장하도록 도우시고 성령으로 은사들을 계발시키면서 아브라함을 두둔하시고 이삭을 변호하시며 야곱을 기다려 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결점조차 공동체의 이익에 합하도록 만들어 내십니다.
아브라함. 노인의 나이에 후처를 얻어 자식을 줄줄이 낳다니, 주책도 보통 주책이 아닙니다! 요즘은 주책을 좋게 해석하대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 믿고 줄줄이 생산하고 있나요? 그럼에도 이방인들의 책망에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지켜주시고 그를 선지다! 라 하시며 함부로 비판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들도 인간의 노욕처럼 보였지만, 훗날 요셉을 형제들에게서 살려낸 이는 바로 미디안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자손들입니다(창 37:28). 아브라함은 주책을 부렸으나 하나님께서는 주책조차도 약속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만들어 내십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늘에서 이런 광경을 보면서 그두라에게 감사하고 미디안 이스마엘 자식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허물을 민족을 구원하는 공적으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겠지요. 이는, 아브라함만 아니라 모든 성경인물에 해당됩니다.
한국교회는 한 그런가요? 한국교회가 얼마나 파울을 많이 범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못합니까? 한국교회의 리스크만으로도 동네북이 되고 있는 처지인데 이단들의 잘못까지 우리가 덤터기 쓰고 있으니 당연히 사람들이 떠나고 한 마디로, 망하기 직전까지 까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참 고마우셔요! 작년 통계청의 종교인구조사에서 기독교 967만명, 불교 761만명, 로마가톨릭 천주교는 389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하나님되심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시고 대한민국 제1의 종교라고 우리의 위신을 팍팍~ 세워주신 것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결론
애꾸눈을 가진 왕. 전쟁터에서 화살을 맞고 애꾸눈이 되었을까요? 왕은 초상화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궁정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습니다.
궁정화가1. 애꾸눈 사실 그대로 그렸습니다. 왕, “이런 얼굴을 만백성에게 보여야 하냐?”
궁정화가2. 멀쩡한 두 눈을 꾸며서 그렸습니다. 왕, “세상이 다 아는 일을 감추려 하느냐?”
궁정화가3. 왕의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왕, “초상화인데 왜 옆모습인가?”
“임금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미소 띤 옆모습입니다.”
어떤 이야기에는 칼을 차고 말에 올라탄 왕의 한 쪽 얼굴을 그렸다고 합니다. 요지인즉, 거짓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드러내고, 진실을 드러내면서도 상대방의 흠을 감추는 화가의 지혜는 성경족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허물을 보이면서도 그의 위신을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믿음생활에서 일으켜 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 하나님은 나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나님이라 부르심 받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흙수저 인생이기에 오히려 쓰임 받는 소목사님, 잰틀하고 쟁쟁한 목사님들에게서보다 스스로를 흙수저라 하면서 흙수저처럼! 엿장사처럼! 광대처럼! 원맨쇼하듯 풀어헤치는 스토리텔링의 소목사님 설교에서 청중들은 오늘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크게 보고 열광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펙이 없는 사람이 다듬어지지 않는 투박함에 열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한 사람의 생애에서 한 지점에만 닻을 내리지 마세요! 그는 옛날에 내가 알았던 그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날 실수하고 허물이 있어도 그는 회개하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쓰임을 받는 중입니다. 나 혼자만 그 사람 허물의 그 지점에 닻을 내리고 비판이나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을 부정해 버리는 교만의 죄! 무지의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나만 손해입니다.
140이 넘어 자식을 낳은 아브라함의 허물! 바로 그 허물로 태어난 자식들로 인해 아브라함 사라의 증손자 요셉이 애굽 보디발의 집으로 인도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의 파노라마를 우리는 성경에서만 아니라 내 주변에서 볼 때 우리는 항상 좋은 닻내림을 할 수 있고 그 닻내림으로 우리도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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