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두 “와 보라”(요한복음 1:37-39, 46-47)

갈렙처럼 2025. 2. 1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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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와 보라”

요한복음 1장 37-39, 46-47절

 

서론

설 명절에 집에 있으면서 몇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현용수 교수님이 쓰신 <인성교육노하우>입니다. 네 권으로 된 책인데… 펼쳐보니 전에 나왔던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는 책을 보완한 증보판입니다. 읽었었지만 그래도 워낙 좋은 내용이기에 연휴에 네 권을 다 읽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미국의 바나 리서치그룹이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조사했습니다. 5~13세 사이에 예수님을 영접할 확률은 32%, 14~18세 사이의 확률은 4%, 19세 이상의 나이가 되면 영접률이 6%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른 통계인데, 미국 목회자들 67%도 13세 이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통계는 13세 이후가 되면 영접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성인(成人) 연령을 13세로 보는 것은 상당히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언제 믿으셨나요? 저처럼 5세 이전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상당히 유리한 믿음생활을 하는 셈입니다. 달리기로 비유한다면, 신앙의 경주에서 남들보다 10m 앞선 출발선에서 시작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13세 이하의 마음을 백지로 봅니다. 13세 이후의 마음은 글자가 가득 적힌 종이로 봅니다. 백지에 글을 쓰는 것이 유리한가요, 글자로 가득 차 있는 종이에 빈곳 찾아내어 쓰는 것이 유리한가요? 당연히 백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조기교육을 강조합니다.

 

금년도 우리 사역주제는 <다음세대교육을 위해 헌신하라>입니다. 또 하나는 1인1명 전도사역입니다. 두 주제는 교회의 두 바퀴입니다. 교회교육은 자녀들에 대한 수직전도요, 1인1명 전도사역은 남들을 향한 수평전도입니다. 교육과 전도는 교회에 맡겨진 사명입니다.

 

본문은 12제자의 형성사입니다. 제자그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기원인 셈입니다. 제자그룹의 형성은 와 보라! 로 요약됩니다. 와 보라! 두 번이 나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하셨던 말씀이고 한 번은 제자가 자기 친구에게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1. 예수님의 “와 보라”

세례요한은 30세가 될 때쯤부터 요단강에서 세례주면서 선지사역을 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 나타났을 때 요한의 눈이 밝아집니다. 그에게서 성전으로 끌려가던 양(羊)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그것은 요한도 전혀 예기치 않았던 외침입니다! 성령의 외침입니다!

 

그때쯤 세례요한에게는 여러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명이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과 예수님의 동생 안드레입니다. 세례요한은 두 제자에게 말합니다.

 

36절,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세례요한이 “보라!” 는 말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 보라! 는 것입니다. 총애하는 제자를 더 좋은 스승에게 인도하고 이양(移讓)하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훌륭한 것입니다. 비켜설 줄 아는 지혜, 용기. 참된 신앙입니다!

 

두 명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무엇을 찾느냐?)

 

찾아온 까닭을 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주님을 찾으십니까? 세상의 부귀와 명예입니까? 가정의 평안입니까? 성공입니까? 웰빙입니까? 건강입니까? 아니면 인간관계입니까? 큰 교회는 명함을 돌리기 위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찾은 첫 자리에 무엇이 있습니까?

 

소망교회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 더 많이 부흥했다고 합니다. 그 쟁쟁한 사람들이 왜 나왔을까요? 줄을 잡기위해… 대통령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인맥(人脈)을 형성하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닐까요?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고관(高官)이 되니까 금방 대형교회로 옮깁니다. 그 사람이 또 출세를 위해 수원의 어떤 큰 교회로 옮깁니다. 잘못된 목적을 찾아 나온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왜 나를 찾아왔느냐? 라는 질문에 두 제자는 뭐라고 되묻습니까? 어디 계십니까? 참으로 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당신은 무엇 하는 분입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계십니까? 거(居)하시는 장소를 물었습니다. 거하는 장소를 묻는 것은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머물면서 당신을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스승에게서 예수님을 소개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구세주입니다. 함께 거하면서 구세주되심을 확신하고 세상에 구세주를 알리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의 구도자적인 진지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와 보라” 하십니다. 정확한 번역은 “와봐! 그러면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Come, and you shall see)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때는 39절, 10시입니다. 우리시간으로 오후 4시입니다. 오후 4시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에는 늦은 시각입니다. 그날 밤 그들은 예수님과 거하면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어린양 되심-메시아됨을 보았습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만나고 알고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고 병 고침을 받고 먹을 것을 얻고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거(居)하지 않았습니다. 스치고 지나가버리고 좋은 것만 얻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디에 가서 예수님을 안다고 할까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 받지 않는 사람들… 바로 이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아닐까요?

 

늘그막에 크리스천이 된 이어령 박사는 4가지 유형의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 발로 믿는 사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 기도나 봉사에 열심을 냅니다. 마르다 유형입니다. 이런 분들은 움직이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 가슴으로 믿는 사람. ‘마리아 유형’으로 말씀을 듣고 감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할렐루야와 아멘을 합니다.”

 

㈂ 머리로 믿는 사람. 이 박사는 이 유형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토로합니다. 발로 걸어보지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머리를 ‘굴리며’ 생각을 거듭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지성(知性)의 작용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믿을 경우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이 이 전 장관이 깨달음입입니다.

 

㈃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한 온 몸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발로만, 가슴으로만, 머리로만 믿어서는 부족합니다. 모든 것이 합쳐져야 합니다. 온전한 몸을 이뤄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신자입니다. 예수님이 전형이 되십니다. 이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교회) 여러 부정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희망인 것은 이런 몸으로 믿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유형의 크리스천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신자는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따라나선 자다. 신자라면 ‘이런 부름은 어떤 결단과 단절을 가져오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물음을 갖고 홀로 대답을 알고 계신 분에게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와 보라! 할 때 나와 함께 지내자! 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이전 스승 세례요한과의 결별만이 아니라 지난세상과의 단절을 뜻합니다. 더 이상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생애를 의탁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결단이 있었기에 함께 그 밤을 묵을 수 있었고, 3년을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제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처럼 되어라’는 미션을 주셨습니다. 그러려면 와보라! 자신에게 와서 거하라는 것입니다. 결단과 내려놓음과 자기포기, 자기해체… 주님과 함께 녹아지고 익어지고 성숙되는 장맛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겸손과 즐거움과 평안과 어울려 살아가는 행복한 공동체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가 전도는 하지 못해도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그룹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간접 전도이자 가장 확실한 전도입니다.

 

와 보라! 우리교회에 보여줄 만한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보여줄 예수들이 있습니까? 그러면 건강한 교회이고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2. 제자의 “와 보라”

유대랍비들은 신청서를 받고 제자들을 뽑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도적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랍비들과의 차이점입니다. 이때 뽑힌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은 한 동네 갈릴리 벳새다사람들입니다. 벳새다는 “어부의 집” 어촌(漁村)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특징은 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보화를 발견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빌립이 친구인 나다나엘을 전도합니다. 45절, 구약성경이 기록한 메시아를 우리가 만났다! 요셉의 아들 예수시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46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고 빈정댑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 남방 유다인에게는 갈릴리조차도 변방입니다. 예수님의 출신지인 나사렛은 그 갈릴리사람들조차 업신여기는 땅이었습니다.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나사렛은 작고 이름 없는 곳으로 주민은 600명~2천 명 정도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 말에 주눅 들지 않고 예수님처럼 “와 보라!”고 합니다. 빌립의 태도와 말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한 당당함입니다. 비록 나사렛은 초라한 동네이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인을 구원하실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 자체가 큰 브랜드-상품가치입니다. 다른 것은 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 써보라는 것입니다. 자신감입니다.

 

㈁ 당당한 초청입니다. 빌립은 구걸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와 보라! 즉 너도 한 번 믿어봐라! 나처럼 행복할 거야! 나처럼 진리를 발견할 거야! 라고 말합니다. 체험된 믿음, 경험된 믿음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주눅 들지 않고 주님을 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그는 배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지식을 얻는 것이고 소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만이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죄사함과 천국에 대한 영생, 삶의 행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통해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지난 세월 기독교는 인류역사 문명에 엄청난 공헌을 했습니다. 고아원제도 병원제도 학교제도… 모두가 교회로부터 왔습니다. 적십자운동, 호스피스운동도 기독교로부터 출발했습니다. 활자도 구텐베르크 성경을 시작으로 합니다. 비행기는 목사의 쌍둥이 아들이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훨씬 더 더딘 문명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2008년 중앙일보가 보도한 바에 의하면, 종교계 대북지원에서 기독교가 절반 이상을 넘으며 종교별 헌혈실적은 기독교가 83.4%, 천주교가 10% 불교가 0.9%입니다. 골수 장기기증자는 기독교가 27.6%, 천주교가 6.3%, 불교가 5.7%입니다.

물론 한국교회는 어떻게 하다보니 국내 종교 선호도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스컴들이 의도적으로 한국교회를 폄하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어령 박사는 교회를 ‘컴퓨터 자판’으로 풀이합니다. 자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판은 아날로그 세계를 사이버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자판이 부실하고, 잘못되었을지라도 본질적인 기능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판이 망가진 교회를 보고 컴퓨터 자체(기독교)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통로입니다. 현관입니다. 교회 자체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최후의 방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현관입니다.

 

우리가 당당해야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한국교회가 때로는 실수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고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당당하게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빌립도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친구 나다나엘에게 당당히 “와 보라!”고 합니다. 자기가 경험했던 바입니다. 그러니 당당할 수 있습니다.

 

빌립식의 전도-“와 보라!” 논증도 변증도 설득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와봐! 참 좋다!” 이런 전도방식이 필요할 때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래도 교회만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고 이것이 당당한 기독교입니다.

 

그러면 내가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행복하고 자존감이 넘치고 뭔가 믿을 수 있는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바탕 삼아 빌립은 인격전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격전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교회에 와봐! 너도 나처럼 행복할 거야”

최고의 전도입니다. 바로 이런 빌립식 전도방법으로 금년에 전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셜록 홈즈의 탐정소설은 전 세계에 수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셜록 홈즈를 주인공으로 만든 사람은 의사이면서 작가인 코난 도일 경(卿)입니다. 코난 도일이 기선을 타고 여행 중이었는데, 한 선원이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하나님을 심하게 모욕하는 말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우습게도 선원의 몸에는 십자가, 가시면류관,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물고기 문신들로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코난 도일경은 이 광경을 묘사하면서, “오늘의 기독교란 문신을 가진 그 사람의 경우처럼, 겨우 살갗 깊이 정도의 신앙밖에는 안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때로는 교회가 이런 유형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가 소개하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교회는 우리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와 보라! 우리는 수없이 초청해야 합니다. 당신도 이제 당당하게 초청자가 되십시오! 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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