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설교

[교리야 노올자] 하나님의 사역(事役), 작정하심(로마서 11:34~36)

갈렙처럼 2025. 2. 24. 14:14
반응형

자료=픽사베이

하나님의 사역(事役), 작정하심

로마서 11장 34~36절

 

서론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본질(本質)을 알아보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면서 인격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 안에서 서로 교제하시고, 기뻐하시며, 서로를 영화롭게 하는 사역(事役)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사역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름다운 교제의 사역을 하면서 피조물(인간과 우주 만물을 포함)들을 위한 역사도 힘차게 진행시켜 나가십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 활동을 살펴봅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끝내고 지금은 안식한다 합니다. 창세기 2:3의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를 거론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주 밖으로 나가셔서 쉬고, 우주의 일은 사람에게 맡겨버리고 사람의 일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 개념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호와는 땅 끝까지 편만하신 분, 어느 곳에나 실재하시는 실존이십니다.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역사하셨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시며 창세전에 우주적인 계획을 완벽한 지혜로 완벽하게 하시고 계획하신 바대로 진행하며 세상을 통치해 나가십니다. 어떤 대적도 하나님의 사역을 변경하거나 정지시킬 수 없습니다.

 

시편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33:11)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도모’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영영하고 인간이 그 목적에 거역하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계획에 조금도 손상을 끼치지 못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진행되어 나갑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작정(作定)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될 일체의 사건들에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목적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만물에 대한 모든 일을 미리 작정하시되 가장 선하고 좋게 계획하십니다. 그러므로 후회나 포기나 변개치 않고 그대로 수행되며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태양계의 운행, 사계절의 변화 등 우주의 큰 부분만 아니라 인간 세상의 아주 작은 것까지 세밀하게 포함이 됩니다.

 

우리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 역시 하나님의 원대로 되어지는(엡 1:11) ‘선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선합니다. 물론 어떤 일들은 선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삶이 힘들고 곤고함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이 모든 슬픔과 고난도 하나님에 의해 미리 작정된 것인가?' '나의 실패나 낙방… 삼풍백화점, 지하철 참사, 세월호…로 희생당한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작정 하에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을 품었던 사람이 유대인 랍비 헤롤드 쿠시너입니다. 쿠시너는 세 살짜리 아들 아론이 희귀한 병 조로증(早老症)에 걸려 15년을 살다 가는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께 호소했고 원망했고 아이를 살려내기 위해 성직자라는 체통을 벗어던집니다. 아이가 죽자 “나는 삶의 상처를 입은 한 사람의 종교인이다!”고 말하면서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책에서 랍비는 하나님 동정론을 말합니다. 불행은 나쁜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좋은 일은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는데… 그게 반대로도 되는 불공평한 현실에 대해 하나님을 이해하자고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잘 하고 싶은데 안 되는 일도 있지 않냐, 내 불행은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기에 내 불행에 가슴 아파하니, 우리도 하나님에게 너무 불행의 이유를 알려달라고 밀어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그럴듯하지요? 그러나 이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을 말할 때 당연히 품을 수 있는 의문사항들에 대해서조차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 하고 선듯 대답해 버리기에는 용납하지 못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라면 너무 섭섭하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고… 그래서 불행한 일을 당하면 혼란스럽고 믿음들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바울도 33절에서 말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깊도다~ 우물처럼 깊고도 어둡도다….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을 측정한다는 것은 깊은 우물과 같아서 아무리 들여다보고 물을 퍼 올려도 다 이해할 수도 측정도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측정이 불가능하고 이해가 불가능하면서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벌어진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무조건 옳은 일이고 무조건 선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정론이 팔자론과 뭐가 다르냐고 합니다. 다르지요. 팔자론은 모든 것이 의미도 목표가 없는 우연의 연속이지만 작정론은 어떤 목적 하에 일이 일어나고 진행되는 것입니다. 팔자론이 공중 미아(迷兒) 신세인 우주선이라면 작정론은 지상 관제탑에서 완벽하게 통제되고 계획대로 진행되는 우주선입니다. 어느 게 안전하고 확실하겠습니까.

작정의 범위

하나님의 작정 범위는 어디까지 포함될까요? 온 우주를 포괄하고 특히 인간이 중심입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는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입니다(엡 2:10). 마리아가 예수 잉태,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준 모든 일들… 우리 선행도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악한 행위(잠 16:4), 나의 나쁜 짓도 작정되었다? 이런 부분에선 이해가 참 곤란한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 일도 사실입니다. 이런 데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우발적이고도 돌발적인 사건들이 천재지변으로 우연히 일어난 참사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 들어 있습니다(창 45:8, 50:20). 인간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배신당하고 장사꾼에게 팔리고, 노예 신세, 여주인의 음모, 지하 감옥 행, 왕의 측근을 만나고 꿈을 해몽하기 위해 왕의 부름을 받게 되고, 총리가 되고 기근 중에 있던 형제들과의 상봉, 애굽 이주, 대민족 이룸, 가나안 귀환, 이스라엘 국가가 되는… 이런 일련의 시나리오는 사람 입장에서는 모두 우연으로 보이지만 시련과 성공의 엎치락뒤치락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요셉이나 특정인물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물론 악인들조차 모든 인간의 길은 하나님의 작정표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나아가는 방향과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들도 작정되었습니다(살후 2:13). 요셉의 생애 가운데서 너무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 개인의 수명(욥 14:5, 시 39:4)도 모두 작정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인명은 하늘에 있다는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거처(행 7:26). 대한민국에 출생하게 된 것, 고향, 이사… 등등 모두 하나님의 작정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선택도 하나님의 작정에 있다고요? 물론입니다!

 

이처럼 인간 출생, 성장과정, 결혼, 출산, 취직, 성공, 실패…는 모두가 하나님의 작정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할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반경, 발자국 하나하나는 물론, 내 손의 활동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에… 하나님께서 너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굳이 이런 작정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면 어떤 경우에는 왜 이리 나쁘게 작정하시는가? 하는 불만입니다.

 

하나님의 작정 교리를 거절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 이유를 듭니다.

 

비판1.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이나 사건 등을 작정하셨다면 사람은 그 시나리오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의 어떠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도둑질을 하건 살인을 하건 하나님의 작정으로 되어진 것이니 내 죄가 아니다! 나아가서 내가 범죄하고도 “하나님의 뜻인데 내가 안 할 수 있었겠느냐?”는 해괴망측한 주장을 합니다. 오랫동안 교제하고 돈도 얻어 써 놓고는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의 작정에 없다!”는 식으로 오리발을 내놓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정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철저히 부정해 버리는 교리라고 반박합니다.

 

이런 주장은, 얼핏 논리적입니다. 인간의 세밀한 부분, 동작까지 작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로봇에 불과합니다. 악한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사람의 악을 징벌할 수 없으며, 악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의문도 나옵니다. 그래서 작정교리를 비웃는 자들은 뺨을 갈겨 놓고 이것도 하나님의 작정이냐고 빈정거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 교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관계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분명히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로 자신이 계획하고, 결정하고, 도둑질을 하고, 악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분명 나 자신의 결정이고,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커다란 작정 안에서, 서로간의 부조화와 모순이 없이 수용되어집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하여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작정의 범위 밖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비판2. 구원에 대한 인간적 노력의 모든 동기를 제거해 버린다!

세상 역사의 흐름이나 일상사, 개인 구원이 이미 작정되었다면 애써 수고할 필요도 없고 전도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작정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을 인간은 모르기에 모든 일에 성실히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바로 내가 그런 일에 헌신하고 땀 흘리도록 작정되었다는, 작정을 더 선하게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전도 역시, 작정된 사람은 알아서 교회 나오고 구원받겠지, 하는 안일한 자세보다는 그 사람을 전도할 사람이 바로 내 자신으로 작정되었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적극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악을 대할 때는 선한 쪽으로 가도록 작정되었음을 믿고 선한 쪽의 선택으로 나가야 하며 선한 일을 만났을 때는 바로 내가 그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작정되었다는 마음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 교리에 대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이 교리가 얼마나 유익합니까? 선을 행하고 악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일에 얼마나 긍정적입니까?

 

비판3.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든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가룟 유다 역시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죄짓는 문제까지는 작정하지 않으셨다!’

 

이런 답이 나와야겠지만 그것 역시 참 대답은 될 수 없습니다. 아담과 유다가 자기의 자유의지만을 사용하면서 인생을 살아갔습니까? 인간 논리대로라면 두 주장 간에 이해충돌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유다가 죄를 짓도록 작정하거나 조성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죄를 짓도록 작정하신 것도 아니다!’

 

한쪽에서는 악인들의 악행조차 하나님의 작정이다, 한쪽에서는 악인들은 하나님의 섭리와는 관계없이 자기 일을 한다! 이런 상호 모순을 해결하려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죄를 계획하거나 조작한 것이 아니라 다만 악인들의 악행을 허용했다고 말합니다. 이를 가리켜 ‘허용적 작정’이라 부릅니다. 물론 이 경우도 결과적으로는 악인들의 악행 역시 하나님의 ‘작정 하에' 하나님의 총괄하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폐가 있고 교리적인 문제가 남아있지만) 왜 악인들의 악행까지도 작정해 놓으셨을까요?

 

지혜서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악인도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뭔가 이바지를 한다는 것입니다. 2007년, 분당샘물교회 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이슬람 근본주의 과격단체 탈레반에게 붙잡혀 배형규 목사(42세)와 또 한 형제가 숨졌습니다. 배목사를 참수시킨 테러리스트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악인입니다. 선교하러 갔던 사람의 목숨을 하나님께서는 왜 악인들에게 맡기셨을까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이해 영역에서는, 이 일로 이슬람근본주의자들에 대한 이슬람권 내부의 비판이 일어났고 그런 악행을 자제하는 효과가 되었습니다. 이슬람선교를 결심하는 젊은이들이 일어났습니다. 교민들에 대한 정부의 안전관리가 새롭게 짜여졌습니다. 악인들의 악행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입니다. 그럼에도 배목사님이나 심성민(29세) 형제의 가족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이런 일에 대해 개인 문제로 들어가면 더 의문이 생깁니다. 의문이 더 많이 생기고 골치가 더 지끈거립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지식도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데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골치가 아프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니 어떻게 정리해야 합니까?

 

일단 좋은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작정을 100% 이해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허물이나 악행, 나쁜 일들이나 인간의 이기심과 죄로 일어나는 인재(人災)참사들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고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지진, 폭풍, 쓰나미… 등의 천재지변에 대해서는 특별한 해석을 시도하기보다는 자연이 순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자연재해들이지만 그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처럼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결론

사람들이 장로교의 핵심교리를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장로교의 핵심교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습니다. 3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최고의 권위자이시며, 모든 일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에 따라서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로서 그가 원하는 것에 대한 행사에 절대적 권리와 권위를 가진다는 것! 이렇게 하나님의 주인된 절대적인 권리 행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이해도 못하고 때로는 반감도 나지만 우리 인생에서, 구원에서, 사역에서 얼마나 든든한 믿음입니까. 망망 바다에서 내가 운전하는 배가 안전합니까? 바다를 창조하신 분의 운전에 맡기는 것이 안전합니까? 죽음 이후에 사후세계가 어찌되나 걱정하면서 죽는 것이 평안합니까?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믿으며 눈을 감고 남아있는 자들은 사랑하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 하에 떠나보내는 것이 살 소망이 생기겠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우리의 삶을 더욱 굳세게 하며 확신적인 인생으로 살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세상 사람들처럼 운명이나 팔자에 맡기겠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 맡겨드리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권리로 세상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 통치 하에 인생의 길을 맡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인생에 닥친 일들이 애해가 되지 않고 만족하지 못하고 심한 고난의 세월이라 해도 모두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인생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되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바둑판 위에 있습니다.

 

몇 개의 돌이 죽기도 하고 에워싸임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 수를 앞서 보시는 분입니다. 그런 절대적 주권으로 우리 인생의 한판승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에게 삶을 맡기며 이렇게 고백하며 그 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36절을 함께 읽고 마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