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역, 창조(創造)
창세기 1장 1~5절
서론
하나님께서는 여러 계시수단으로 당신의 존재를 스스로 알리시더니 이번에는 천지창조로 알리십니다. 성경은 구속사이면서 인류의 근원(根源)을 알려주는 유일한 ‘과학서’입니다. 과학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하나님의 계시 하에 나옵니다. 만물 창조는 모든 것이 ‘궁금 사전’에 속합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믿는 창조론이고 다른 하나는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우주는 본래부터 물질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생물의 형태가 간단(簡單)한 것에서 점점 복잡(複雜)한 것으로, 하등(下等)에서 고등(高等)동물로 진화해 갔다… 그러니까 수십 억 년을, 무기물(無機物)이 자연적으로 변해 아미노산과 같은 유기물(有機物)이 나왔으며 유기물에서 가장 원시적인 미생물(微生物)인 아메바가 나왔고 이 아메바가 고등하게 진화하여 원숭이를 거쳐 인간이 되었다… 이것이 진화론의 핵심 골자입니다.
진화론은 적자생존론을 말합니다. 진화되는 과정에서 만물은 그 종류대로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며, 환경에 맞는 우수한 종(種)만이 살아남아 발전해 간다,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먹히는 것, 강한 자는 더 강해지고, 약한 자는 퇴보하다 없어진다는 적자생존론은 자연의 비정함을 보여줍니다.
진화론자들은 신체 부위의 발달을 들어서 진화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자주 사용하는 것은 기능이 더 발달하고, 그렇지 않는 것은 퇴보성을 가져온다! 물론 무엇이든 쓰지 않으면 기능이 퇴보, 퇴화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종(種)에 한해서 그런 것이지 다른 종(種)으로의 변이가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어떻든 적자생존론은 강자들은 힘을 무기로 우선시하고 약자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이 있습니다.
사실 설교자들이 진화론을 말하지만 진화론에 대한 지식은 미약합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이 들으면 초등학교 수준일 것입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TV에 나와서 요한복음을 강설하고 도마복음을 말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건 짜깁기요 말놀음입니다. 진화론자들도 우리가 말하는 진화론을 들으면 웃긴다 할 것입니다. 그만큼 진화론은 학자마다 다르고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설교자들은 성도님들을 지켜내기 위해 어설픈 실력으로라도 진화론을 말해야 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과의 대결에서는 당연히 진화론이 우위를 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화론자들은 ‘과학’이라는 무기를 동원하여 완벽하게 입증할 수 없는 것들을 완벽한 과학적 산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학교 역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일에 진화론과 창조론을 같은 선상이 아니라, 진화론은 ‘과학(科學)’이요, 창조론은 ‘종교(宗敎)’라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진화론만이 과학이고 창조는 신화(神話)로 이해합니다. 그러면서도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기원’이 나와 창조론을 흔들었지만, 그래서 모든 교육과정이 진화론 중심이었지만 지난 세월 동안 기독교가 창조론을 지켜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삼위의 협동사역
성경은 우주 만물의 기원을 긴 설명 없이 하나님의 전능성에 둡니다.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주와 만물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선언입니다. 우주 창조는 인간 역사 이전의 일이기에 다 증명하고 이해하기는 곤란합니다. 어머니의 태(胎)에 있었을 때의 일을 알지 못하듯이 창세전에 되어진, 베일에 싸인 일을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창조론은 ‘증명’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1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주 천체(天體)와 지구와 그 안의 것들을 기존의 재료 없이 하나님께서 “…있으라” 하심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습니다. 사람이나(창2:7) 동물(2:19)은 1차 창조물인 재료-흙을 빚어 창조했습니다. 유(有)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만물 창조는 삼위일체의 협동 사역입니다. 성부는 만물 창조를 계획하셨고(창1:1,2) 성자는 만물을 창조(요1:3). 성령은 창조된 것에 생명을 주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수식(修飾)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성부는 설계하고, 성자는 직접 건축하고, 성령은 집안의 장식을 담당한 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과학에 돌립니다.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학은 무엇이며 과학은 100% 사실입니까? 영국의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그동안 주장해 왔던 블랙홀 이론을 62세 때에 180도 뒤집는 논문을 공식 발표해 세계 과학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호킹은, 블랙홀 부근에는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이란 영역이 있어, 한 번 들어간 물질과 이 물질에 대한 정보는 이곳에 갇혀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새 이론에서는 블랙홀은 빨아들인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며, 대신 더 긴 시간 방출을 계속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호킹의 블랙홀 이론을 ‘과학의 승리’라고 치켜세웠던 과학자들은 충격 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고고학이나 생물학… 등은 당시에는 과학처럼 보였지만 지식이 점점 발달하면서 오류(誤謬)였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면서도 “과학은 이래서…” “과학적이지 못해서…” 라는 말로 종교를 미신 취급합니다. 과학도 검증되지 못한 것이 많고 증거를 드러내지 못하는 게 많습니다.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도 “이렇다면…?”이라는 가정(假定) 내지 가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과학과 종교 양자는 믿음을 전제로 출발합니다. 과학도 믿음의 전제가 없이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우주의 기원을 밝혀내는 과학도 그 안에는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종교성이 내재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그렇다 해도 정확한 증거가 있습니까? 지구의 나이를 수십억 년 수백억만년… 이라 해도 남겨진 기록이 있습니까? 측정과 예측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 역시 불확실한 증거입니다. 과학적 측정도 ‘믿어야’ 가능합니다. 과학도 믿음이라는 종교성에 의지하지 않고는 연구를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을 종교라 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강 건너편 기슭을 멀리 바라볼 수는 있지만 과학의 방법으로는 그리 건너갈 수 없다“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창조의 순서
하나님께서는 굳이 만물을 창조하실 어떤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주에 아무 것도 없고, 칠흑같이 어둔 암흑세계였다해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스스로 영화로우시고, 기쁨을 계속적으로 창출해 내시는 자아충족자(自我充足者)이십니다. 만물이나 인간을 굳이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영원부터 빛의 세계였기 때문입니다. 우주 창조는 외로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발적 결단에 의한 자유로운 행위였습니다(엡1:11).
성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알립니다. ‘태초’(太初)는 모든 만물의 시초로 시간 그 자체의 시초까지 의미합니다. 세계는 어느 시간의 중간에야 비로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습니다. 태초 이전에는 시간도 없고, 흐름도 없는 영원(永遠)만이 흘렀습니다. 그런 고요함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화로운 교제를 누리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하시는데, 창조는 모두 엿새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1장의 ‘날’은, 지금의 24시간인가, 아니면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인가? ‘날’은 히브리어 ‘욤’으로 세 가지 의미로 나오는데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1장의 ‘하루’가 지금의 하루인 24시간이다, 아니다, 로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24시간이 더 되기도 하고 덜 될 수도 있습니다. 태양이 넷째 날 만들어졌다고 전 3일과 후 3일의 시간적 길이를 서로 다른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지구의 자전적 속도가 처음부터 동일했다면 이 날이 지금의 24시간의 하루였다는 판단도 무리가 없지만 절대적인 해석일 수는 없습니다.)
첫째 날-빛 창조(3절). 빛은 생명(生命)을 뜻합니다.
둘째 날-궁창 창조(6절). 궁창(穹蒼)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의 넓은 공간입니다.
셋째 날-바다, 땅, 식물 창조(11-13절). 식물은 ‘종류대로’(11절) 창조하셨습니다. 독특하게 구별된 종(種. species)의 형태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짐승도 “종류대로”(25절) 만드셨습니다. 이런 표현은 1장에서만 5회나 등장합니다(11, 12, 22, 24, 25절). 이는 생물의 종(種)은 점차 진화해 왔다는 진화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넷째 날-해, 달, 별을 창조(14-18절). 천지에 떠 있는 모든 발광체(發光體)를 만드셨습니다.
다섯째 날-조류, 어류 창조(21-23절). 새와 물고기들도 역시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여섯째 날-동물, 사람 창조(24-27절). 사람만 흙으로 빚으시는 ‘행동’(行動)을 하신 것이 아니라 짐승을 만들 때도 흙으로 빚어서 창조하는 수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날~셋째 날까지 앞의 3일은 공간(空間)이나 영역(領域)을 만드셨고,
넷째 날~여섯째 날까 후의 3일은, 공간과 영역을 ‘채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셨으면, 넷째 날에 빛의 발광체, 반사체인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넣고,
둘째 날 궁창(하늘)을 만드셨으면, 다섯째 날에는 궁창을 나는 새로 채우셨습니다.
셋째 날 땅과 식물을 만들었으면, 여섯째 날엔 동물과 관리할 사람을 창조해 채워 넣습니다.
창조의 순서는 이처럼 정확하고 완벽합니다. 첫째 날 빛 창조 대신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가정해보세요. 어둔 공간에서 첫 사람은 얼마나 두렵고 떨었을까요? 사람을 식물보다 먼저 만드셨다면 땅은 얼마나 황폐하고 첫 사람은 어쩔 줄을 몰랐을 거예요. 그러나 만물을 다 만드시고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고 눈을 뜨고 처음 본 자연은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비어있는 상황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봅니다. 빛의 공간에는 해와 달들로 채우시고, 창공에는 새들로 채우시고 땅에는 사람과 짐승들로 채우셨습니다. 창조의 사역자 예수 그리스도는 비어있는 곳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마구간도 채우시고 빈그물도 채우시고 비어있는 뱃세다 들판도 기적으로 채우셨습니다. 시신으로 채워질 빈 무덤에는 부활의 생명으로 채우셨습니다. 창조 시에 이미 그런 모습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창조의 완벽성
창조의 세밀함과 완벽성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살아가는 은하계(은하수)에는 태양과 같은 별이 1,000억 개가 넘습니다. 우주에는 다시 우리 은하계와 같은 규모의 다른 은하계가 1000억 개가 넘게 있습니다. (2016년, 은하계가 2조 개로 이른다는 이론도 있음). 그야말로 하늘의 별은 땅의 모래알처럼이나 많은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우주입니다. 우주는 빛의 속도(초속 20만km)로 달려도 100억년이 걸립니다.
-태양과 지구 거리는 가장 적합한 온도가 되도록 떼어 놓으셨습니다. 만일 지구 평균 온도가 2-3도만 올라 극지방의 빙하가 녹는다면 런던, 뉴욕은 바다 밑 60m 깊이에 잠기게 됩니다.
-지구의 크기가 적당합니다. 만일 10%만 크거나 작거나 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생명도 지구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구 축(軸)이 23.5도 경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만일 태양이 항상 적도 위에 있다면 계절의 변화가 전혀 없었을 터이요, 경작과 주거에 적절한 지구 표면은 반으로 감소될 것입니다.
-지구 밖 64km 위의 오존층의 존재는 태양의 살인 광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모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렘5:22). 사막의 모래가 있기에 바닷물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뱀, 지렁이, 토끼, 먼지 등 모두가 필요합니다. 모두 “보시기에 좋았던” 피조물입니다.
-한 숟가락의 황토 속에는 2억 마리의 미생물(微生物)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땅은 얼마나 많은 미생물로 가득 채워져 있을까요? 땅이 생명을 낳는 것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순서에서조차 사랑과 지식과 인간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참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주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로울 뿐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경이롭다!”(아서 에딩턴 경)
창조의 동기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만드신 까닭은 무엇인가요?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행복(幸福)이 궁극적 목적이라 합니다. 인간행복론이지요. 고대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들, 종교개혁 시대의 인문주의자들, 18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이 인간행복론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나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사랑을 누리시기에, 자기 충족자로서 피조물을 절대로 필요하지 않기에 구태여 만물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을 인간의 행복에서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인간을 만들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도 즐거우시겠기에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 행복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물이 창조되었다!(사43:7, 시19: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하나님의 영광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장(章)입니다. 창조가 핵심인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내용물이 핵심이 아닙니다. 1장은 창조주가 핵심입니다. 창조주는 누구십니까? 유일신입니다. 모세는 다신론뿐이던 세상에 유일신 개념을 처음으로 선언한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유대인은 유일신의 아이디어를 세상에 소개한 첫 민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유일신은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유일신 사상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모든 인류가 영적으로 유일신을 아는 신지식이 파괴되고 만물을 우상화하며 다신론 사상으로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낼 민족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자손들을 애굽에서 큰 부족(部族)으로 만드시고 부족 사회였던 그들을 출애굽 시키면서 민족(民族)으로 조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유일신 개념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라”(출 3:14).
그 말은 “나는 유일신이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성경을 쓰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 분은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모두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그 분은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다!”
창세기 1장은 바로 유일신 사상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창세기 1장 창조의 장을 읽으면서 첫째 날은 무엇을 만들고, 둘째 날은 무엇을 만들고… 이런 ‘지식’ ‘암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1장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나는 그 분의 피조물이다,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 살아야 한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달으면 됩니다.
결론
두 남자가 봄 길을 걷고 있는데 새들은 지저귀며 목장에서는 소가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야아, 조물주는 실로 위대하시다. 벌레 한 마리를 보더라도 신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단 말이야. 커다란 소가 처음에는 작은 송아지였고 저 하늘을 나는 새는 처음에는 알이었고….”
다른 남자가 그 말을 받았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한 가지 모를 것은 새들은 작으니까 별로 먹이를 많이 먹지 않잖아. 소는 몸집이 크니 엄청나게 많이 먹고. 그런데 많이 먹기 위해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될 소에게는 날개가 없고, 조금만 먹어도 사 새에게는 날개가 있으니… 왜 그리 창조하셨을까…”
말하는 순간 새가 날아가며 그 남자의 이마에 똥을 떨어뜨렸습니다. 새똥이 아니라 쇠똥이 머리나 이마, 얼굴, 양복에 떨어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자 남자는 잽싸게 소리쳤습니다.
“아하! 이제 알겠다. 왜 소에게 날개를 달아주시지 않았는지! 역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의 우주 만물 창조. 성경의 가르침, 종교로 이해할 것인가, 진화론적인 과학종교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런 문제가 개인 앞에 남겨집니다. 둘 다 결국은 '믿음의 선택'입니다. 과학적인 만물생성은 가도 가도 끝없는 탐색입니다. 오늘은 이 과학자에 의해 이렇게 설명되고, 내일은 다른 연구설이 제기될 것입니다. 진화론이 언제 뒤집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어차피 창조종교와 과학종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피조된 존재를 인정하고 출발을 하나님에게 두는 게 훨씬 더 목적이 뚜렷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우연에 거는 것보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맡기면서 사는 것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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