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역, 섭리(攝理)
시편 145편 1~7절
서론
지난 시간, 창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중세계를 포함합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는 우리가 연구하고 탐색하고 발전시켜야 하겠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신비의 베일 속에 남겨둔채 말씀의 범위 안에서만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사 숭배나 신비주의에 빠지고 믿음이 잘못 될 수 있습니다.
천사 창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창조입니다. 천사(天使) 역시 피조물로서(시148:1~5) 엿새 동안의 어느 하루에 창조되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창조의 날짜는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피조세계에 관한 창조 기사만을 다루고 있기에 천사의 창조 문제는 생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천사의 존재를 말하면서 영적 존재요(마8:16, 히1:14), 인격적 존재로 표현합니다. 지성을 소유하고(삼하14:20) 도덕적이며(유6), 사랑하고 기뻐하고(눅15:10), 원하고(벧전1:12), 예배드리며(히1:6), 말하기도 합니다(슥1:9). 하나님의 명령 이행을 위해 오기도 가기도 합니다.
천사들은 영(靈)이기에, 결혼하지 않으며(마22:30), 보이지 않으며(골1:16)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극히 제한된 공간에서도 다수로 임재합니다(눅8:30). 러시아가 공산화될 때는 정교회는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 올라설 수 있느냐를 갖고 밤새도록 입씨름했습니다.
천사들 중에 얼마는 선하고, 거룩하고, 선택받은 빛의 천사들입니다(딤전5:21, 막8:38). 일부의 천사들은 원시 상태에서 타락하여 악한 천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요8:44, 벧후2:4, 유6). 그런 천사들은 죄성에 물들여 다투기도 합니다(유9, 계12:7).
천사의 계급
수호천사를 말하지만 성경에는 없습니다. 천사는 대단히 많습니다. 천사들을 상징하는 ‘일만 성도’(신33:2), 천천만만(시68:17), 하나님의 병거(천사), 군대(막5:9, 15). 천만천사(히12:22)…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5회나 나옵니다.(창6:11, 욥기1:6… 등). 천사들은 직무와 계급이 있어 자체 내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룹’ 천사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 영광을 계시하며, 하나님의 거룩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수호합니다(삼상4:4). ‘스랍’ 천사들은 화목케 하는 일을 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돕습니다(사6:2, 3, 6). 천사들 중에서 귀족 계급입니다.
‘가브리엘’은 인간에게 신적계시를 전달하고 해석해 주는 직무를 수행합니다(단8:16, 눅1:19).
‘미가엘’ 천사장(유9절)은, 악한 영계(靈界)의 권세를 저항하여 여호와의 전투를 수행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천사장은, 죄의 창시자로 사단, 마귀, 큰 용, 옛 뱀이라 합니다.(창3:1, 요일3:8, 계20:2, 10). 이외에도 정사, 권세, 보좌, 주관…의 칭호들은 천사들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천사로되 등급과 존귀와 위엄의 차이를 보여줍니다(엡3:10, 골1:16, 2:10).
하나님의 섭리
섭리(攝理)란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을 말합니다. 역사의 진행은 법칙이 있는가, 우연히 흘러가는가? 답은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인정하는가, 않는가? 에 달려있습니다.
무신론자(無神論者)-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며 사는 비종교인들입니다.
범신론자(汎神論者)-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사역을 오해합니다. 자연 자체를 하나님과 동일시합니다. 나무에도 신이 있고, 풀 한 포기조차 신입니다. 자연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영(靈)이 들어 있다면서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대신 자연과 하나님을 동일시해 버립니다. 지금 성행하는 종교들 중에는 범신론적인 신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연신론자(自然神論者)-범신론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철저히 분리시켜 버립니다. 조물주(造物主)는 세계를 창조하시고, 어떤 운행법칙을 세우고 난 후에는 손을 떼고 창조세계 밖으로 물러나 관망의 태도를 취합니다. 모든 역사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고, 우연한 사건의 돌발로 무고한 생명들이 수난 당한다 합니다. 그 수난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구름 너머에서 지루한 하루를 보내다 아주 급박했을 때는 마지못해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범신론과 자연신론은 정반대이면서 성경적 신관을 거부하는 일에는 동일합니다. 범신론은 하나님을 철저히 물질화해 버렸고, 자연신론은 하나님을 인간역사에서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무소부재(無所不在), 온 세상에 존재하신다 합니다. 하나님의 부재(不在)가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 자체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를 주장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超越)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거룩함과 지혜의 권능으로써 모든 창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시며 하시는 일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우주 역사의 곳곳에 그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며,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개입하시며, 만물을 자신의 작정과 계획대로 인도하시는데 이를 섭리(攝理)라 합니다. 우주 전체를 관리하시는 ‘일반섭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세밀한 부분까지 다스리시며 인도하시는 섭리를 ‘특별섭리’입니다(느9:6).
하나님의 '예정'은 이미 정해진 것이요 '섭리'는 예정대로 실현해 가는 활동입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본질'에, 섭리는 하나님의 '활동방식'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정은 시나리오요 섭리는 시나리오대로 작동되는 원리와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만사를 섭리해 나가실 때는 세 가지 요소(수단)를 사용하십니다.
보존
하나님은 결코 만물 세계에서 퇴장하지 않으십니다. 곳곳에 존재하시며 주도적으로 다스려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은 어느 것도 허락 없이 사라지거나 멸종되는 일이 없습니다. 새 한 마리도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며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주권적이며, 절대적으로 독립적입니다. 단독으로 세상을 다스려 나가십니다. 마니교에서는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이 있어 선신이 이기면 선한 일들이 발생되고 악신이 이기면 악한 일이 일어난다 합니다. 어거스틴이 이 종교에 잠시 몸을 담은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통치자라고 합니다. 창조자는 창조세계를 보존하십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6:9)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알아서 굴러가라.. 알아서 살아라... 하지 않고 만물이 창조계획대로 존재하도록 보존해 주십니다. 그 보전을 우리에게 위임하기도 하십니다. 여기서 자연보호, 환경보호가 갈립니다. 무신론 세상에서 자연보호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해 보호하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우리는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영광이 계속 빛나도록 환경을 보호하고 자연보호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창조세계를 보존하신다는 것에 대해 때로는 의문도 듭니다.
‘테러로 무고한 인명들이 죽는데 하나님은 모른 체 하실까? 악인의 독재를 왜 보고만 계실까’
마땅한 답이 없지만 그래도 세상이 창조주의 손에 보존되고, 보전되고 있다 믿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삶을 맡기고 세상을 맡길 수가 있습니다. 세상이 정처 없이 흘러가고 누구도 보존해 주지 않는다, 생각하면 돈도 힘도 권력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만 생깁니다. 내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런 확신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협력
우주 창조는 하나님의 단독 역사이나 우주를 보존하는 데에는 피조물의 협력을 필요합니다. 지구는 생명체이기에 나이를 먹고 수명이 다하면 종말이 옵니다.
그날까지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세밀히 관리하시면서 보존하십니다. 보존해 나가시는 과정 중에 모든 창조물과 협력하시며, 특히 인간들과 협동하여 다스려 나가십니다. 구원은 인간의 협력 없이 단독으로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나 우리가 누릴 축복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협력의 결과입니다.
성경 인물들은 세상 역사에 깊은 관심과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산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역사에 책임성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은’(창1장) 세상을 원하시며 우주에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며 하나님의 왕국이 땅에서 확장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 인물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협력하여 더 나은 지구, 더 나은 조국을 위해 힘썼습니다.
에스더는 좋은 협력자였습니다. 에스더가 협력치 아니해도 하나님은 또 다른 수단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에스더가 협력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이루어지면서, 에스더도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 링컨도 좋은 협력자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정치나 다방면에 진출해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노력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좋은 협력자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들도 좋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협력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함과 아울러 복을 주시려 협력을 구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좋은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헌신된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왜 외면하십니까? 불법이 자행되는데 왜 나 몰라라 하십니까?”
이런 항의성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너를 세상에 보냈노라! 네가 나대신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찾아가고 너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위해 나 대신 일하라고 너를 세상에 두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매사에 개입하셔야 하고 인간은 로봇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로봇 대신에 좋은 동역을 원하십니다. 사람을 제대로 대접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좋은 동역자요, 좋은 협력관계입니까? 하나님과 좋은 협력자가 되려면 대가와 수고가 따릅니다. 내가 치른 대가에 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엄청 큽니다. 수고한 것에 비해 채워주시는 것은 더 엄청납니다.
통치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자신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만물을 다스려 나가십니다. 우리는 지식이 짧아서 하나님의 통치 행위를 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지 못합니다. 악인들의 득세와 의인들의 수난-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통치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 유린당하고 멸망당해도 왜 가만히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통치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미친다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망하고 수모를 당하느냐 따지고 듭니다.
하박국은 세상의 ‘모순’을 캐물으며 절규로 끝나버린 선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기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며, 여전히 통치하시며, 당신의 섭리대로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더욱 든든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유명한 고백, “비록 …이 없을 지라도” “비록 …이 안 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기다리며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합니다(합3:17~19).
하박국은 모순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기다림’과 ‘지켜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기다림’은 악인들의 심판을 정해놓으신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고 ‘지켜봄’은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부어줄 사람들을 찾으시려는 관심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말합니다. 견딤의 ‘크기’가 쓰임의 ‘크기’를 결정하며 견딤의 ‘기간’이 쓰임의 ‘기간’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버티고 견디면서 때를 기다립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문장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베일에 싸인 신비입니다. 누구에게도 비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런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야속하게도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이 없이 세상이 굴러간다는 것은 더더욱 참기 어려운 상황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인생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훨씬 더 세상에 대한 자신감과 희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스펄젼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도록 정교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를 간파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눈은 그걸 볼만큼 그렇게 좋지를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 고통이 여러분에게 주는 유익을 보기를 원하지만 그걸 보지 못할 지라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고통이 어떻게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을 가져다줄지 알기를 원하는 데 얼마 후에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걸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십시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 중심으로 살아가지 마십시오. 과학은 발전을 거듭해 나갈 것이며 종교의 자리는 좁아갈 것입니다. 니체를 대표로 하는 사신철학에 이어 ‘급진신학과 신의 죽음’을 공동저술한 해밀턴과 알타이저에 의해 사신신학도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 인간의 사망선고로 하나님께서는 사망하시는 것일까요?
인간의 인정과 관계없이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릴 때 이미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죽은 것이지 하나님 자체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출생 자체가 없으시기에 죽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하나님의 수레바퀴는 너무 천천히 돌아갑니다. 때로는 물레방아가 정지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하나님의 보존과 통치에 대해 의심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때로는 아주 천천히 돌아가면서도 역사의 낱알을 낱낱이 다 찧어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심판대 앞에 세우고 역사의 기록을 통해 악행들을 들추고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심으로 공의로운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오스 힐먼은,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살피심도 커짐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한 박자 늦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지나고 봐야 하나님이 보인다! 이런 확신에서 살면 오늘 내 상황 속에서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오늘이 어제가 되면 보인다는 진리를 믿으며 오늘도 눈에 보이는 듯 힘을 얻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오늘로 신론(神論)-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다음에는 인간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을 아는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으시기에 상당히 혼란과 의혹을 더해 준 부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대강 믿을 때는 의심이 없었는데 더 알고 믿으려니 오히려 지적혼란과 의혹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3절,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사랑하는 성도님들! 측량하지 못하는 하나님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측량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측량하지 못하는 대상)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에 생애를 맡기며 하루하루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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