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설교

[교리야 노올자] 삼위일체로 하나님을 알리다!(마가복음 1:9~11)

갈렙처럼 2025. 2. 2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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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픽사베이

삼위일체로 하나님을 알리다!

마가복음 1장 9~11절

 

서론

지난해 12월에 출시한 인공지능(AI) 챗봇(GPT)에 질문을 던지면 뭐든지 5초 안에 대답을 해줍니다. 논문이나 뉴스 기사, 제주도 여행 일정을 짜달라고 했더니 순식간에 답을 내놓습니다. 베스트셀라 작가 유발 하라리는 그의 대표작 ‘사피엔스’ 출간 10주년 기념서문을 인공지능 AI에 맡겼더니 AI가 쓴 글의 완성도가 뛰어나서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백합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챗봇GPT이 의사, 변호사 시험도 통과했습니다. 이제 세상은 점점 신비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합리적이었고 인간 이성이 중명하지 못하면 설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공지능이라 해도 하나님의 영역은 해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지능 더 깊은 곳, 더 높은 곳, 더 넓은 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미생물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신비하고 또 신비한 분입니다. 그래서 합리성을 중시하며 그 지식이 난다 긴다 하는 유대인들도 성경계시가 합리성보다 우선한다고 믿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다 건드려도 여호와라면 껌뻑 죽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존재는 신비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신비 중의 신비가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실체를 계시함에 삼위일체라는 특별한 인격체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믿는 하늘님도 성경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와, 우리는 하늘님이라 불린 용어의 차이뿐 같은 하나님 신(神)을 신봉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이런 하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머리에서 창작되어진 신들의 존재를 확연히 구별하기 위해 ‘삼위일체’로서의 자신을 성경 속에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원리가 되는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다, 한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는 3위(位, 3인격)가 존재한다, 3위의 ‘위’는 포지션(position)이 아니라 인격(person)입니다.

 

그러기에 각자가 완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를 이루어 있기에 위(位-인격) 밖에서나 위(位)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다, 더욱이 그 위(位)들은 각각 다른 위(位)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서로 치우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이게 신비 중에서 신비입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의 지성으로 이를 해석하려 합니다. 잘못된 삼위일체 해석이 양태론과 삼신론입니다. 양태론은 단일신이 모양만 다르게 나타난 것이라 봅니다. 사람에 비교하여 집에서는 가장이요 나가면 회사원이요, 교회에서는 어떤 직분자이다… 동질의 물이 얼음과 수증기의 형태를 가진다… 이런 예로 말합니다. 삼신론은 말 그대로 3신(神)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신론인 것이지요.

 

이에 대해 325년 니케아공의회(公議會)에서 교회의 정통신조로 공인되었으며,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추인됨으로써 두 주장은 이단 신학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해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혼란함을 가중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신비한 것이기에 이해(理解)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信仰)의 대상으로서 수용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어떤 사실과 진리를 버리기 시작한다면 이 세상에 버려야 할 것들 투성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들이 주변에 수두룩하듯이 3위1체 교리 역시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삼위일체의 성경적 증거

물론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점점 체계화 되고 이론화되어 가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자 터툴리안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발견해 냅니다. 그렇다고 터툴리안이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들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만유인력(gravitation)은 아이작 뉴턴이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뉴턴이 1666에 그걸 발견했을 뿐입니다. 삼위일체도 그래요, 성경에 그 용어만 없을 뿐 삼위일체의 속성을 알리는 내용이나 성경구절은 종종 언급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우리가”라는 복수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실컷 유일신이라 해놓고 “우리가”라는 복수는 자기모순입니다. 복수형에는 삼위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제1위하나님(성부)-‘우리가’ 이리저리 창조하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 육신으로 나타나신 제2위하나님(성자)-구약에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인물이 종종 하나님과 방불한 인격으로 나옵니다(창 16:7, 9, 32:1).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라고 할 때 그들은 인간의 시야(視野) 속에 자신의 모습을 육체의 모양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입니다.

 

㉢ 운동하시는 제3위하나님(성령)-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신”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게 합니다. 암탉이 부화를 위해 알을 굴리는 모양새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단순히 하나님의 어떤 능력이나 기운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 자신임이 명백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복수를 띄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세 분? 그렇다면 다신론이 됩니다. 존재상으로 세 분이지만 하나님이라는 본체 안에서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서 삼위가 드러납니다.

 

㉠ 말씀하시는 하나님(성부)-“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11절)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시는 그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성자. 9절)-이 분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던 성령(10절)-이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세 분이 존재하고 있음은 확실해졌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성부 하나님, 독생자로서의 성자 하나님, 영으로서 활동하는 성령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이제 세 분의 인격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한 하나님이 되시는가, 살펴봅시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하셨습니다.

 

나를 본 것으로 하나님을 보았다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과 일체입니다.

 

㉡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인격적으로 따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아나니아가 땅 판 값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을 때 베드로는 “네가 성령을 속이고”(행5:3)라고 하더니 하나님을 속였다 합니다(4절). 성령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그러므로 예수와 성령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도표로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0부터 따라가 봅시다.

*성부는 하나님이시다.

*성자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이번에는 ×표를 따라가 봅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다.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다.

*성령은 성부가 아니시다.

그러면서 세 분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의 명백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3위(位)는 각기 다른 인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하나이고 그러면서도 한 위(位)가 다른 위(位)에게 종속되지 않은 이 신비적 연합(聯合)이야말로 그리스도교 교리 진수(眞髓)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심장이다”, 권위적인 구약학자 델리취는 ‘구원의 구약 역사’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은 철학적 추리의 산물이 아니고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사건이다”라고 합니다.

 

신학자 에빌링은 “삼위일체를 논할 때 인간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삼위일체의 영원을 말할 때 인간의 언어는 폭발해 버린다.”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 대적자들의 조롱이 되어왔고 이단들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어떤 비판자들은, 기독교는 머리가 셋 달린 신을 믿는다 조롱했고 이단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뭐 그리 중요하냐며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예수는 단순히 인간 예수이고 성령은 하나님의 기운 정도로 해석을 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이 많은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머리에 이해가 잘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교가 원수들의 조롱과 이단 발생의 위험 속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천지창조의 사역은 물론 우리 구원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천지창조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의 구원 역사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사역

삼위가 하시는 사역이 무엇이기에 천지창조와 인간 구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까요?

우리가 흔히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할 때 성부 하나님 한 분의 독단적인 창조사역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천지창조에는 삼위 하나님의 협동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 성부 하나님-우주만물의 창조를 계획하셨습니다.

창조의 범위, 수효, 자리, 연대… 등을 완벽하게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성을 띄시기에 완벽한 창조 계획이 가능했습니다. 만물의 기능이나 수효를 잘못 계산하고나 별자리들의 위치를 잘못 선정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며 완벽하십니다. 그 분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 성자 하나님-성부의 창조계획서를 보시며 직접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계획은 성부에게서 나왔지만 계획서에 근거해서 수효대로 직접 창조하신 분은 성자이십니다.

 

㉢ 성령 하나님-그 다음의 순서를 이어 맡으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천지창조 시에 성령은 성자가 만드신 만물에 기운을 주고 운동력을 주고 운행하게, 사계절의 순환을 시작했습니다.

천지창조에서 성령이 하신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령은 성자가 창조해 낸 것에 운행하는 힘을 주고 빛을 발하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성부는 다양한 꽃들을 고안해 주셨고 성자는 만드셨습니다. 성령은 여기에 성장하고 향기가 나게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동적인 창조의 역사는 건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부는 설계가이고 성자는 설계도를 보면서 직접 집을 짓는 건축자입니다. 성령은 인테리어-꾸미고 수식하고 아름답게 장식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만약 여기에 어느 하나라도 협동하지 않으면 온전한 건축, 완벽한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지요. 그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에베소서 1:3~14에 자세히 나옵니다.

 

㉠ 성부 하나님의 사역(3-5절)

성부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삼위 중에서 창조와 섭리의 사역을 대표하십니다. 창세전에 인생의 구원을 미리 계획하시며 인생의 모든 삶의 스토리를 예정하십니다.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발생(發生-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합니다. 성자를 통해서 인간의 죄들을 제거하십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성자를 지키시며 성자의 구속 사역을 흡족하게 받으십니다. 예수님을 무덤에서 살리시며 장차 만물에 대한 심판을 성자의 손에 위임하십니다. 그리고 성자의 요청에 의해 성령을 파송합니다.

 

㉡ 성자 하나님의 사역(7-12절)

만물은 성자를 통해서 창조되며 보존됩니다. 성자는 구원의 중보자가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육신하시며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합니다. 성자는 성부에게 성령 파송을 요청하십니다. 부활 승천 이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인생을 위해 기도하시며 교회를 보호하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성도와 함께 하며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 성령 하나님의 사역(13-14절).

창조와 구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반영합니다. 성자의 구속사역이 사람들에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십니다. 자신이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구세주가 되심을 믿게 합니다. 인간에게 영감을 공급해 주시며 재능을 부여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오류가 없도록 집필하게 하고 성경을 번역하도록 계속적인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로 교회를 형성, 확장, 보존, 보완하며 모든 교회를 인도하시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상이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입니다. 읽을수록 들을수록 이해가 안 되고 더 복잡합니다. 더 복잡한 게 정상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해하고 있다면 제 설명이 뭔가 성경적이지 못하고 소위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며 가장 기독교적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가장 깊고 높고 신비한 것입니다. 이런 신비한 내용을 이해했다는 자체가 뭔가 냄새가 납니다.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주 정상입니다.

 

그러면 뭐하려 이렇게 장시간에 걸쳐 삼위일체를 설교합니까?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못하더라도 삼위의 창조적 역할, 구원적 역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구원이 확실해 지고 우리 쪽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은혜의 구원을 위해서 삼위 하나님께서 얼마나 희생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그 마음을 알게 되고 그만큼 감사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의 하나님이 일반 종교학적인 의미에서의 ‘하늘님’ ‘하느님’ ‘옥황상제’ … 등과의 분명한 차별화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나도 하늘님을 믿고 왔습니다!” 말할 때 “어떤 하나님인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인가?”라는 질문 앞에 어떤 대답을 하는가? 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의 진위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늘님, 복을 주신 신령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는 나와는 관계가 없구나!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내가 아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저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할 때에만 우리 믿음은 진정한 구원의 믿음이 되고 영생의 믿음이 됩니다.

 

결론

신학자 어거스틴은 성경적 난제(難題)를 많이 해석했는데 삼위일체 교리도 분명하게 인간언어로, 인간의 이해 체계로 설명해 주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고 고심하던 중에 꿈을 꾸었습니다.

 

한 소년이 바닷물을 모래밭으로 퍼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했더니 바다의 물을 전부 모래밭으로 퍼내려한다는 것입니다. 그 망망한 대해(大海)를 퍼낼 수도 없지만 모래밭으로 퍼내봐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게 아닙니까?

어거스틴:“너는 쓸데없는 일을 하는구나! 백날을 그래봐야 소용이 없는 짓이란다.”

소년:“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은 아저씨도 마찬가지예요. 아저씨는 삼위일체 교리를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삼위일체를 이해시키는 것보다는 내가 바닷물을 모래밭으로 몽땅 옮기는 게 더 쉬운 일일걸요?”

 

어거스틴은 소년의 말에 망치로 얻어맞는 충격을 받으며 깨어났습니다. 소년의 말은 옳았습니다. 삼위일체는 처음부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이었습니다. 그걸 이해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해 못할 것이 뻔하면서도 창조사역에서, 우리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믿음으로 다른 하나님과의 차별화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해를 못하면서도 삼위일체 교리는 부인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믿어 믿음이 더욱 풍성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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