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설교

[교리야 노올자] 성품으로 하나님을 알리다!(비공유적 속성)(출애굽기 3:14)

갈렙처럼 2025. 2. 15.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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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픽사베이

성품으로 하나님을 알리다!(비공유적 속성)

출애굽기 3장 14절

 

 

서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한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지식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지식에서 나온 하나님 개념은 종교심을 통한 연구, 종교적인 상상, 창작에 의한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 하나님도 생존 세상에서 의지가 되고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오는 많은 이득이 있을 수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세에 아무 것도 보장받을 수 없는, 결국 없는 하나님(하느님)의 존재에 평생 종교라는 미명하에 속아 살아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이 바로 신화(神話)이고 전설(傳說)입니다. 그리고 다신론의 종교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려면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계시(드러내심, 알려주심)해 주신 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지난 설교에서 이름을 통한 ‘하나님 알리기’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성품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알리기

오늘은 성품(속성․屬性)을 통한 하나님의 ‘하나님 알리기’를 보겠습니다.

모든 동식물에는 성품(性品)이 있습니다. 포악한 동물이 있는가 하면 온순한 동물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초식동물은 온화하고 육식동물은 거칠다고 합니다.

 

어느 분의 글인지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초식동물=온화함, 육식동물=거칠다는 등식은 잘못된 것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고정관념으로부터 오는 편견이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보다 더 강하고 거칠고 사납다고 하는 식물학자들도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우리와 공유(共有)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성품은 어떤가요? 성품은 어떤 의미에서 “진짜 나” “숨겨진 나”입니다. 나를 잘 몰라도 내 성품을 겪어본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품은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성품은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줍니다.

 

하나님도 인간처럼 속성(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둘로 나뉠 수 있는데, 우선 ‘절대적 속성’부터 알아봅시다.

 

절대적 속성(絶對的 屬性)은, 인간들에게서 그 비슷한 성품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만의 고유한 성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같은 인격체가 되면서도 참된 절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공유적 속성이 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질은 조금도 인간에게 나눠주지 않습니다. 같이 공유하지 않는 성품이라고 해서 이를 비(非) 공유적 속성(共有的屬性)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대략 네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없는 이런 네 가지의 비공유적 속성이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해도 이런 절대적 속성이 없는 한, 인간은 그냥 피조물인 인간일 뿐입니다.

① 자존성(自存性)-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있습니다.(독립성)

세상 종교의 교주들은 출생이 있고 그를 낳아 준 부모가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아버지는 인도의 카필라 바스투의 성주였던 정반왕이었고, 어머니는 마야 부인이었습니다.

유교의 개조인 공자는 중국 고대의 노나라에서 아버지 공흘(孔紇), 어머니 안징재에게서 출생하였습니다.

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아버지는 아브다이고, 어머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습니다. (동아대백과사전 11권)

 

우리나라에도 통일교에서는 문선명이 신이다, 전도관에서는 박태선 하나님, 영생교에서는 조회성이 하나님이다… 등등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하지만 종교의 교주들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은 출생 기록을 갖고 있고 그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출생한 적이 있는 존재가 어떻게 절대적인 신(神)이 될 수 있습니까? 그가 만약 신이라면 그를 낳아준 그들 부모는 두 분 모두 신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자신만 신이라고 하지 그들 부모들도 신이라고 하는 종교 교주들, 사이비교주들의 주장을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인간 이성의 이론에도 그들의 주장은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 계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출생 기사가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생일이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에게는 ‘출생’이라는 시작이 없습니다. 시작이 없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만물은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습니다. 하루살이에서 몇 백 년을 산다는 장수(長壽)의 학이나 거북이 등도 종말이 옵니다.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존성’이라는 절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에서 독립해서 스스로 존재하시며 인간처럼 외부의 어떤 것에 그의 존재를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 개념은 ‘여호와’라는 이름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절대적 신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겠습니까? 사람의 부모에게서 출생하여 스스로를 신이라고 우기는 교주들을 신으로 모시며 살겠습니까? 후자라면 인간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사람에게서 출생하기는 했지만 자존하시는 영생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생의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복음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② 불변성(不變性)-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불변하십니다.

석가나 공자… 등은 출생했고 성장했고 늙어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 아직 도덕적 의식이 완전하지 못했을 때 약속을 어겼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변합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그는 무생물이거나 죽음 그 자체입니다. 살아 숨쉬는 것은 변화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에 늙어 죽지도 않고, 약속을 어기지도 않고, 어제나 오늘이나 불변(不變)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존재 자체가 영원히 동일한 성품을 가지셨기에 그의 존재, 완전성, 목적성, 약속에 있어서 변화하지 않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언약)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약속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고, 아브라함에게서 성취된 약속이야말로 우리에게서 이루어 나가실 확실한 언약입니다.

 

아더 핑크(A. S. Pink)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갈수록 더 좋게 변화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러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더 나쁘게 변화되시지도 않는다.”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신념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변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쇠해질 때가 있고 선한 행위도 악행으로 변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불변성이라는 절대성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불변하십니다. 그의 약속하심이 불변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그 분의 약속의 불변함에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와 관계없이 우리와 맺은 언약을 지키실 것이고 당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그 불변성에 의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우리의 구원과 이처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 자신의 구원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의 구원은 자신의 행위에 근거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에 근거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죄사함을 얻게 될 것이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으면 아무리 인간이 깨끗하게 산다고 해도 그는 스스로 의로운 인간이 될 수 없고 스스로의 구원 문제를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는 불변이시기에 그 분의 약속도 불변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구원을 약속한 적이 없으시기에 시대가 흐르고 아무리 위대한 존재가 태어나도 그는 스스로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구약의 노아의 방주에서 이런 사실을 살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앞으로는 절대 홍수로 세상을 망하게 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이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창 9:11, 12). 그리고 그 약속대로 인간 역사에는 인간 종족을 멸종시키는 대홍수가 없었습니다. 노아 때보다 더 큰 죄악이 일어났음에도 대홍수로 세상을 씻어버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품 자체가 불변이시기에 인간의 태도와 관계없이 그 약속을 변함없이 지금까지 지켜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런 불변의 약속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문제를 약속할 때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보로 구원하마!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미 에덴에서부터 은유적으로 있었습니다(창 3:15).

 

이 약속은 구약시대의 백성이든 신약시대의 백성이든 누구에게나 유효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근거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았으며 우리의 구원도 바로 그 불변의 약속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에 근거한 구원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 행위나 내 믿음에 입각한 구원관을 갖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늘 불안합니다.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교회에 좀 열심히 다니고 제법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면 구원의 확신과 안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떨어지거나 열심을 내지 못하면 구원은 불안합니다. 이런 구원관은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인간 자신에게 근거를 둔 것이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변하는 자신의 행위나 믿음에 둘 것이 아니라 변함이 없는, 영원히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행위에 관계없이 안전한 구원관을 갖게 될 것이며 주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개념은 바른 구원관의 원인이 됩니다.

③ 무한성(無限性)-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서도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의 무한성이란 그의 성질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속하는 일체를 인간은 전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존재가 스스로 하나님인체 한다는 것은 참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 유한한 인생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며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더 우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요소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무한성)-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완전하십니다.

그러기에 성품도 인격도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그 분의 지혜, 지식, 사랑 등에서 무한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왜냐?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며 내가 가는 모든 길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나의 인생의 길 전부를 보시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안내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에게 길을 맡기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 분을 의뢰하고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하나님의 무한성은 시간과 관련되면 영원성이라는 말로 대체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무한하십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끝없는 연속’이라고 표현합니다(시 90:2, 102:12, 엡 3;21). 그러기에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존재만 있을 뿐 과거나 미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의 생애를 예정하셨다고 말하면(엡 1:3-5),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성에 근거하여 이해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수 천 년 전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고 선택, 예정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발상이 소위 헬라적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에게서 발상되는 사고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시간과 계절의 변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과거 미래가 없고 현재로만 영원히 동일하게 존재하시기에 수 천 년 전의 일이나 수 천 년 앞의 미래의 일이 현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재성-하나님의 무한성이 공간과 관계를 맺을 때 이는 편재성(遍在性)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동시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주 모든 공간에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이것이 다신론과의 확연한 차별점 중의 하나입니다. 다신론의 신관은 대부분 지역적인 신,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신 개념입니다. 작게는 가족의 신으로부터 크게는 국가적인 신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우주적인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기에 만민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멋진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옥과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마음에만 계시지 않는다.

그 외에는 모든 곳에, 어떤 곳에서도 존재하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곳에 편재, 혹은 편만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플 때에도 주님은 함께 하시며 우리가 망할 때도 그 분은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도 그 분은 벌써 그곳에 계십니다. 그 분은 세상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온 세상 구석구석이 그 분의 손에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을 때 우리의 믿음은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며 생활을 통해서 예배하는 우수한 믿음이 됩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언제나 계시는 하나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런 하나님의 편재(遍在)하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렵고 떨리고 마음이 아플 때도 우리는 주님을 찬양할 수 있고 끝까지 의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시지만 어떤 것으로부터 일체 영향이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일을 못하면 하나님이 손해 받으신다”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무한하시기에 우리와 상관없이 계속 영광을 누리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 속에 내재(편재)하고 계시지만 그것에 조금도 구속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십니다.

④ 단순성(單純性)-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단일성)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두 분, 세 분, 혹은 수십 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희랍신화의 신들은 태양의 신, 달의 신, 바람의 신… 등등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신관을 가진 사람들이 다신론 신봉자들입니다.

 

성자 어거스틴이 잠시 신봉했던 마니교는 선한 신(善神)과 악한 신(惡神)이 함께 있어 서로 투쟁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될 때에는 선한 신이 나에게서 승리하는 것이고 살다가 다시 악신이 나에게서 이기면 나는 불행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세계사는 선신과 악신의 투쟁사입니다.

 

우리가 이런 신관에게 자신을 맡길 것입니까? 그렇다면 인생이란 얼마나 초라하고 신들의 장난거리에 불과한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의 본질도 여러 신으로 혼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존성, 불변성, 편재성이라는 속성 자체가 하나님의 단순성,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전재합니다.

 

여러 하나님이 다 자존성, 불변성을 갖고 있다면 그게 어떻게 절대적인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상대성을 지닌 신(神)이라면 절대적인 힘을 행사할 수 없고 유일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충만하신 하나님-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 속에도 유일성, 단순성이 들어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 한 분으로 충만해야 그게 가능한 일이지 여러 하나님으로 세상이 충만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신론은 우주적인 유일신이 되지 못하고 부족 중심이거나 지역 중심의 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인격을 가신 분이시지만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에게는 혼합이 섞임이 없습니다. 단순하시고 하나이신 단일성이 있습니다.

 

이상 네 가지의 속성은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 특별한 속성이요, 성품들입니다. 하나님이 되려면 이런 네 가지 속성-인간에게는 나눠 갖지 않으시는 비공유적 속성을 가져야 합니다. 석가나 공자, 문선명… 등을 네 가지 속성에 대입해 봅시다.

 

그들에게 자존성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불변성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편재성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유일성이 있습니까?

 

네 가지 중에 하나도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으로 숭배하거나 자칭 하나님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으니 본인은 물론 그 추종자들은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까?

 

우리가 이처럼 많은 인간 소산물로서의 종교, 사이비 종교, 이단종교의 숲을 헤치고 성경에서 말하는 참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이것이 신앙생활의 바른 걸음의 시작입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의 공유적속성-인간과 함께 공유하시는 인간적 성품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다음에서 배우는 하나님은 훨씬 더 다정다감하고 따듯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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