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하나님을 알리다!
출애굽기 3장 13~15절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인간의 레이더에 전혀 잡히지 않는 분이신데 지금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무엇인가? 그 지식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게 참 궁금하지요?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내보여 주시는 정도만큼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보여 주심-이것이 바로 계시(啓示-Revelation)라는 사실은 앞에서 충분히 이야기가 되었기에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인간은 지혜로워서 과거에 몰랐던 여러 이치를 깨닫고 편리한 기구들을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에 대한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종교학적인 측면에서는 여러 모양으로 정의할 수 있고, 종교적 이론을 전개해 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참 실재와는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존재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세는 교만일 뿐이며, 자기 멸망과 허무로 끝나버릴 뿐입니다. 인간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구도의 자세로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들에게는 충분히 자신을 게시해 주십니다. 자기의 존재를 밝히시며 신뢰하도록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그 신비한 자신의 모습을 계시하고 계신가? 전혀 존재의 차원이 다른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신론의 중심내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참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통해서, 속성(성품)을 통해서, 삼위일체를 통해서, 섭리(攝理)를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이런 계시는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며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리고자 하시는 책입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시해 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면서 ‘기록’ ‘활자’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록’과 ‘활자’는 사람의 것입니다. 사람의 의사전달을 위해, 자기 표현을 위해, 후세에 알리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 그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간의 기록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구원을 얻기에 충분한 정도에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이외의 것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더 완벽하게 찾으려고 하다가는 사람의 생각의 그림에 따라 성경과는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심에서 고안된 하나님이시기에 거짓된 형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상이 출현하고 이단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친 마노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이 무엇이니이까…”(삿13:17)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묘한 대답을 하십니다!
18절, “여호와의 사자가…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기묘자…. ‘기묘자’는 ‘비밀한 자’, ‘신비한 자’로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NIV), 인간 지식으로는 너무도 원더풀(wonderful) ‘놀라운’(RSV), 한 마디로 묘하신 분입니다. 여기에서는 이름보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차원 밖에서 실존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미지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 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자도 하나님 밖에 없다.
인간은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입니다. 유한이 무한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라 육에 속한 것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의 레이더에 전혀 잡히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시는 정도만큼만 압니다. 하나님 계시의 최고봉은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여러 수단으로 당신자신의 본질, 속성, 사역을 알려주십니다. 그 하나가 이름, 호칭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알리심, 계시입니다. 오늘 제목입니다.
만물의 사물과 사람은 이름을 지닙니다. 이름은 대부분 제삼자에 의해 주어집니다. 제 이름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이는 없습니다. 부모나 타인이 작명합니다. 성장해서 자기가 개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이름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혈통을 드러내고 가문의 흔적을 드러냅니다. 성씨(姓氏)를 통해 혈통과 돌림자로 몇 대 손(孫)임을 나타냅니다. 이름만 들어도 어느 정도 집안의 분위기, 그에게 거는 기대를 알 수 있습니다.
매일 100만 명이 찾는다는 토종 한국 기업 ‘다이소’ 박정부 회장은 인터뷰에서 다이소를 운영하는 회사 ‘아성다이소’의 ‘아성’은 어머니가 “아시아에서 성공하라”며 지어주신 회사명이라 밝힙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삯바느질로 4형제 공부를 시킨 어머니는 아들들이 아시아에서 최고 성공부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성’이라고 회사명을 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름이 있습니다. 하늘님, 하느님, 옥황상제… 이는, 사람이 만든 호칭들입니다. 진짜 이름이 아닙니다. 계시 받은 적이 없어 생각대로 하나님 이름을 작명해 버렸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이름으로 ‘하늘님’을 섬기던 때가 있었지요?
이런 이름에는 인격이 없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하늘님! 입니다. 인격이 없는 신은 인간 종교심에서 나온 창작된 신, 영국의 무신론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말하는 ‘만들어진 신’ 불과합니다. ‘만들어진 신’은 이름도 인격도 없기에 우리의 이름을 모릅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는 허공을 향해 염불하는 것입니다. 비는 대상인 신도 이름이 없고 비는 이들도 이름이 없으니 인격적 교제가 없습니다. 우상은 허상, 허무함, 무가치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믿을수록 중독되고 허무함을 느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갖고 계십니다. 그 이름에 준한 대접을 받고 능력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기고, 명예 훼손을 금하는 명령도 되지만 마음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작명하는 일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 나타나는 것을 좇아 호칭해야 합니다.
모세는 살인죄로 기소될 것을 두려워 광야로 도망갑니다. 40년 목자생활을 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데 애굽으로 귀환하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민족의 신, 조상의 신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셨다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알면 자유자재로 부르며,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상신의 이름을 묻습니다.
13절, “누가 나를 보냈으며 보내신 이의 이름을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합니까?”
당시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명칭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의 신, 민족 신, 하늘에 계신 하늘님 정도로 알고 있었을까요? 그 질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 우주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시며 사람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갖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면 이름으로 함께 하시고 이름으로 다가가실까요?
모세는 얼마나 대단해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여호와를 소개하고 출애굽기 3장에서는 세상에 여호와의 이름을 소개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영적 거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이름이 없었다면 지금도 이상한 이름으로, ‘하늘님’, ‘천지신명’, ‘옥황상제’, ‘신령님’ ‘용왕님’… ‘알라’로 섬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바로 여호와, 야훼입니다.
15절,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여호와’라는 이름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영원히 기억할 하나님의 표호, 본명입니다.
‘야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 들어있는 의미
아시는 것처럼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의 언어 헬라어는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잘 묘사합니다. 같은 ‘사랑’이라도 ‘에로스’는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을, ‘필리아’는 친구 간의 우정의 사랑을, ‘아가페’라 하면 무조건적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신약을 읽으면 마음에 감동이 옵니다.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언어로 하나님을 지적으로 상세하게 잘 묘사합니다.
한글에서 ‘하나님’이라면 하늘에 계시는 분, 하나이신 하나님… 그 정도로밖에 묘사가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와, 야훼(Yahweh)라는 단어는 ‘스스로 있는 자’, “나는 존재한다!”는 의미이자 선언입니다. 성경에서 이름들은 당사자의 본성이나 기질을 드러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Jehovah), 영어 성경에 “I AM WHO I AM”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누구냐? “I AM I” 나는 나다!
굳이 설명이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에게 명함이 필요할까요? 명함이 필요 없습니다. 구구절절 자기소개가 필요할까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나? 대통령이야! 한마디면 됩니다. 그게 일국의 대통령의 권위입니다.
하나님도 소개해달라는 말에 한 마디로 답하신 것입니다.
“나? 나는 나다!”
그러면서 여호와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라는 히브리어 단어에는 수많은 여호와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출생도 없이 영원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부모가 없기에 태어난 적이 없고 출생이 없기에 죽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육체가 아닌, '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당시 이런 신관은 이방인에게는 충격적입니다.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자기들처럼 형상을 갖고 있다 여겼기에 사람의 모양, 동물, 식물, 무생물의 형상으로 신의 모양을 표현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영이신 여호와라는 선언은 새로운 신관이어서 히브리인이 핍박받는 이유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이 사실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자꾸 눈에 보이는 형상의 하나님을 기대했고 가나안 우상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성장-노쇠가 없는 불변의 존재임을 알려주십니다.
불변은 외적인 것만 아니라 속성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 선택, 섭리에 변함이 없고, 변개치도 않으십니다. 언약을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구원의 약속을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언약을 깨고 약속을 어겨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변입니다. 당시 신들은 변덕이 심했습니다. 인간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한 이스라엘의 혈통 선택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씀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도 하나님의 언약(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알게 되면 구원 문제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구원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바른 신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이신 여호와는 모든 곳에 계시는 편재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역신이나 부족신이 아니다! 우주적 신이며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히브리인에게 이런 사실은 용기를 주면서도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주적인 하나님,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인에게는 하나님의 통치가 바로 왕도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다는 사실 앞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내 앞에 계시는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두렵고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이런 이름의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신들은 모두 상대적입니다. 가나안의 주신(主神) 바알만 하더라도 아스다롯이라는 여신과 부부 신입니다. 부부신은 상대성입니다. 하나님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유일하신 절대자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유일하신 절대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신 이름입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다 여호와 단어는 아예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묵음(默音. 눈으로만 익고, 실제 발음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했다 합니다. 성경 필사자 서기관들은 ‘여호와’만 쓰는 붓이 따로 있었으며, 이 단어가 나오면 목욕재개 후 작업했다 합니다. ‘여호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위대하심, 광대하심을 바로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수록 그 분 앞에서 조심하고 경외함으로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대통령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모르기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마음대로 윤석열, 문재인… 동네 아이처럼 이름을 부릅니다. 가장 잘 아는 청와대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그만큼 두려워하면서 아는 것만큼 대통령의 권력을 공유합니다. 여호와를 알 때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본명은 여호와(야훼)입니다. 본명 외에 성경은 여러 호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 호칭에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① 하나님-히브리어로 ‘엘’, ‘엘로힘’인데 위엄 있고 권세 있는 분, 그래서 경외의 대상이 되는 신(神)임을 말해줍니다.
② 주(主)-지혜자요,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③ 전능한 하나님-모든 것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후손과 맺은 약속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④ 만군의 여호와-천군 천사에게 호위를 받으며 그의 백성을 위하여 천지를 통치하시며 그의 모든 피조물에게서 영광을 받으실 영광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상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호칭(呼稱)입니다.
이제는 신약에 나타나는 호칭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① 하나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녀의 하나님의 인정된 것을 표시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번역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번역이 됩니다.
② 주(主)-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사용된 이름입니다. 만물의 주인, 소유자, 지배자로서의 하나님, 왕의 권세와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③ 아버지-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할 때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호칭을 일반화시키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마 6:9).
아버지 하나님-창시자, 창조주, 우리들의 좋으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아버지가 민족적인 관계 쪽에 비중을 두고 있다면 신약의 아버지는 개인적인 의미, 부자지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름이 있는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우리의 사정을 알아주시고 약속을 지켜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 그 이름 속에서 만나지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이름이 주는 의미
여호와가 ‘이름’을 가졌다는 것!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시고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선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신학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이고 사실적입니다. 하늘님… 등의 막연한 이름은 그 존재 자체가 막연합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비나이나 비나이다~ 내 소원을 들어주는 이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뭔가에 간절히 정성 들이지 않으면 소원 성취 방법이 없고 마음이 불안하고 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막연한 존재를 상상하며 비는 것입니다. 관계가 막연하니 그게 미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으로 오신 것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에게 이름이 없다 상상해 보세요. 모든 아버지들이 아버지가 되면서 모든 아버지들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하면 진정한 소통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알고 내가 아버지의 아들, 딸이라는 이름으로 나아갈 때 인격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어떤 자매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배웠습니다. 아버지! 고아로 자라난 자매는 한 번도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자매는 하나님의 성전에 홀로 엎드려 밤새도록 울며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얼마나 불러보고 싶은 아버지라는 이름입니까? 아버지라 부를 때 하나님은 아버지로 그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자매를 품고 안아주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따뜻한 아버지였습니다. 어느 신이 아버지와 같은 성품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은 이리도 따뜻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주는 세 번째의 의미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그가 갖고 나간 것은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친히 다스리시는,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초월적 힘과 권세를 지니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실 때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그런 힘들이 우리에게 몰려오고 달려오는 것입니다.
시인 김춘수는 감성시 ‘꽃’에서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바른 이름, 성경에 계시된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르게 부르고 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꽃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이름이 있는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내 사정을 알아주시고 약속을 지켜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 이름으로 만나주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아버지가 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내 이름으로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모르면 그 분도 나를 보면서 “어이, 집사님!” “어, 장로님!” 이렇게 부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교제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를 이름으로 알고 이름을 부르며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31). 베드로도(행2:21)도, 바울도(롬 10:13)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합니다.
여호와를 믿음으로 부르되 바로 알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여호와라 하면서 머리로는 ‘하늘님’이나 ‘하느님’ 정도로 알면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그 이름에 나타나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을 때 여호와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더 깊고도 광활한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앞에 모든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아룁시다! 하나님은 큰 바다와 같으신 분, 우리를 더 품으시며 죄들을 사해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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