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훈 저서 모음/[신수성가]

[神手成家] 6장 명문 족장가문에서 출생하다(2)

갈렙처럼 2025. 4. 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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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手成家 6장]

명문 족장가문에서 출생하다(2)

 

2대 족장 이삭, 할아버지

떠나라! 는 여호와의 말씀 한 마디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지명조차 알 수 없는 땅을 찾아 나섰던 모험가 아버지 아브라함과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며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 등극(登極)한 걸출한 아들 야곱사이에 끼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할아버지 이삭은 너무도 조용하고, 어떻게 보면 안일하다고 할 만큼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스왈드 샌더스는 “이삭은 대단한 은사는 없었던, 조용하고 사색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의 두드러진 특징은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룩한 자그마한 승리조차도 수동적인 성품에서 온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삭은 그만큼 수동적인 생애였다. 어려서부터 아예 독자적인 행동은 없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위대한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그 순간에도 자기 생명과 관계된 일이면서도 타자의 입장이 되었다. 공(功)의 대부분은 아버지에게 넘어갔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네 믿음을 보았다!” 하지 않고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 는 대(大) 칭찬을 했다(22:22). 죽는 사람의 순종이 더 큰가, 죽이는 사람이 더 순종적이겠는가? 죽이는 아버지의 입장도 엄청 고통이지만 죽는 사람의 두려움과 공포만큼이야 하겠는가?

 

이삭은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칭찬을 들어야 했는데 칭찬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갔고 아들은 아버지의 믿음을 돋보이는 보조역할이나 했다. 이삭이 당한 공포와 두려움에는 조금의 상급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리아산의 사건, 이삭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공평한 드라마였다.

결혼문제도 철저히 배제되었다. 결혼 드라마에서는 아버지와 신임을 받는 종이 나올 뿐이지 당사자 이삭은 이번에도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자기의견이라고는 전혀 없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마마보이’ 모습을 보인다(24장).

이삭은 노년이 되어 두 아들을 축복해 주는 문제에서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아내 리브가와 차남 야곱의 속임수에 휘둘리는 무능한 남편,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권위 없는 아버지로 나온다(27장).

 

2대 족장 이삭은 아버지의 믿음에 훨씬 못 미칠 뿐 아니라 대단한 아들 야곱의 기(氣)에도 눌린다. 뛰어난 아버지에게서는 눌림을 받고 탁월한 아들에게는 치인다. 그야말로 중간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수동적인 성품이 되었을까, 대민족을 일구고 땅을 얻어야 하는 족장감으로서는 많이 부족한 리더처럼 보인다. 그래서 누구는 그의 믿음을 이류(二流)믿음이라고 한다. 화이트가 <믿음의 발휘>에서 평한 말이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선구자적 인생행로와 하나님과 나누었던 교제를 비교할 때 이삭의 삶은 덜 종교적이다. 그의 삶은 두려움, 묵묵한 순종, 그리고 위대한 사건에 대한 기억 등으로 뒤섞인, 간접적인 동시에 이류(二流)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신수성가 요셉의 기질을 이루는 대부분의 성품은 할아버지 이삭에게서 온 것이다. 이삭의 성품은 순종과 인내와 온유함이다. 청소년 시절에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아버지를 따라 모리아산 정상에 올라가 드러눕던 순종, 아버지가 짝을 찾아 주실 때까지 40년을 신부를 기다리던 인내, 이웃들과의 분쟁을 피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옮겨 다니던 평화와 온유함은 요셉의 생애에 놀라우리만큼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셉의 멘토(Mentor)는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버지 야곱보다 오히려 할아버지 이삭이다. 인생의 시련 가운데서 가장 많은 힘을 얻은 사람은 이삭 할아버지였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아브라함은 사병(私兵)을 데리고 추격해서 롯의 가족을 구출해 왔다. 야곱은 자기 것을 도로 찾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을 공격해서 빼앗아 오는 스타일이다. 야곱은 내 것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 억척같은 사람이다. 이삭은 우물을 팠다가도 다툼이 생기면 양보하고 다른 우물을 찾아 이동하고, 억울한 일들을 계속 감내만 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는 누구도 해롭게 하지 않고 억울하게 하지 않으면서 온유와 평화로 일관했다(26장).

 

요셉은 17세에 애굽으로 팔렸다. 밧단아람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약 11년째 되던 해(33:7)이다. 이때 야곱의 나이는 108세, 이삭의 나이는 죽기 12년 전이니까 168세(35:28) 가량이다. 그렇다면 유년시절을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듣고 교육을 받았던 기간이 있었을 것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요셉을 할아버지 역시 가련히 여겨 사랑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요셉은 고난 가운데서 항상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남들이 할아버지를 싱거운 이류인생으로 치부했다 해도 요셉은 할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순종과 인내와 온유함, 그것을 붙잡으면서 인생의 시련기를 견디어 낸 것이다.

우리 인생의 승리만이 남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삭처럼 평범한 인생이 요셉에게 영향을 미친다. 요셉만 본다면, 이삭은 아브라함보다 야곱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전수해준 멘토이다. 그것은 아버지로서, 제사장으로서, 사사로서는 실패했지만 사무엘의 멘토로서는 성공했던 엘리의 생애이기도 하다.

3대 족장 야곱, 아버지

아버지 야곱. 아무리 나를 편애해준 아버지였지만 요셉에게는 별로 배울 것이 없는 삶이다. 이름이 보여주는 것처럼 아버지의 생애는 사기꾼적인 성향이 농후했다. 아버지는 거칠고 모사꾼이었다. 사업가로는 성공했어도 좋은 아버지는 못 되었고 언약집안의 족장으로서 신앙 행위도 모범인생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친구로 삼고 싶지 않는 불편한 유형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특출한 사람이었다. 누구나 좋아할 사람은 아니지만 누구나 무시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자식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 존경하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만큼 아버지는 쉽게 설명이 안 되는 미스터리 생애였다. 그러니 마음껏 존경할 수도 없고 인생에서 무시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3대 족장 야곱에게 무엇이 있기에 별로 믿음이 가지 않으면서도 무시할 수도 없었을까? 그것이 야곱의 강점이면서 약점이다. 오스왈드 샌더스의 말처럼, 야곱의 모든 비열함과 이중성 뒤에는 영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열망과 영적인 역량이 있었다. 계속해서 야곱은 불순종했으나 영적 열망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에서의 관대하고 매력적인 외모 뒤에는 영적인 것의 가치에 대한 모멸이 숨어 있었다. 그는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것보다 감각적인 욕망의 만족을 더 좋아했다.

 

반대로 야곱은 영적인 가치를 정확하게 느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육신적인 음모에 의지하였다. 그의 명백한 약점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열망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끊임없이 추적케 하시고 성품 변화훈련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미미한 믿음의 흐름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교활한 사기꾼을 평생 추적하시며 그를 훈련시키시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아버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식별력이자 야곱의 강점이다. 요셉이 이런 아버지에게서 치열한 삶을 배워내지 못했다면 이삭처럼 현실에 지나치게 안주하는 ‘특징 없는’ 싱거운 생애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환상적인 족장 콤비

요셉. 그의 족보에는 이처럼 세 족장이 있었다. 족장들은 아버지들이었고 사부(師父)였고 멘토였다.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는 진취성과 기상을 받았다. 할아버지 이삭에게서는 온유한 성품과 관대함을 받았다. 아버지 야곱에게서는 열정과 치열한 정신을 받았다. 17세에 팔리고 13년을 객지에서 고생하며 신수성가의 생애를 이룬 것은 집안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세 족장 ‘아버지’들의 기질이 요셉에게서 종합적으로 모아졌기 때문이다.

 

세 족장 아버지들에게서 좋은 것들을 받았고 배웠다. 아브라함에게서는 꿈을, 야곱에게서는 꿈을 향한 열정, 이삭에게서는 꿈이 성취될 때까지 묵묵히 참고 기다리는 인내의 성품을 배웠다. 세 족장 아버지들에게서는 결함을 통한 교훈도 얻었다. 아브라함에게서 하갈을 얻어 언약집안에 분쟁이 일어나게 하는 실수를 배우지 못했다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쉽게 물리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에게서 온유와 관대함을 배우지 못했다면 격정적인 공격성으로 보복하고 남을 다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참고 인내하고 화평의 손을 내밀었던 이삭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 형통의 삶을 기대할 수 있었다. 대놓고 멘토링(mentoring) 해주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멘토를 삼고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유익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야곱은 너무 치열한 사람이었다. 유년시절 어머니의 장막에서 뜨개질이나 하던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속에는 용암이 흘렀다.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그런 기질이 있었기에 거부가 되고 네 아내에게서 열두 명의 자식을 얻는 자수성가의 남자가 되었다. 그것은 요셉의 고난을 불러온 동기도 되었다. 아버지가 한 여인으로 만족했다면 형제들 간의 암투와 반목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형들의 음모로 애굽의 고난을 겪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요셉의 애굽행 배후에는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그림이 있었지만 요셉의 입장에서는 고난은 고난이었다. 아무리 나중이 좋았고 대성공을 이루기는 했지만 억울하게 고생한 것조차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13년이나 객지에서 별의별 수모를 당하고 고생하게 된 것은 이복형제들의 탓보다는 복잡한 가족사의 장본인 아버지 야곱 때문이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실수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여러 여인을 취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는 나쁜 남편이 되어서는 안 됨을 배웠다. 자녀들의 미래는 고려하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자녀를 생산해 내는 무책임한 아버지는 되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자녀들끼리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불행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 왕이 제사장의 딸을 중매했을 때 쉽게 승낙했던 것 같다. 제사장의 딸이라면 품행이 단정해서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될 것이고 아버지의 무분별한 여성관의 기질이 자신의 피 속에도 흐르고 있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제사장의 딸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 당당한 제사장의 딸을 부인으로 둔 사람이 어찌 다른 여자들을 탐낼 것인가?

 

오직 한 여자만을 아내로 삼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형제만을 낳은 것도 이복형제들 가운데서 살아왔던 유년시절의 혼란을 생각하면서 산아제한(?)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호기심으로 추측해 본다.

요셉은 이런 3대 족장의 집안에서 4대째로 태어났다. 세 족장은 요셉의 혈통 속에서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면서 요셉을 신수성가의 아름다운 생애를 살아낼 수 있게 한다. 언약의 명문 가문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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