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언약 안에 있는 인간
창세기 2장 9, 16, 17절
서론
우주의 기원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다윈주의자들은 인간을 동물이자 진화과정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인간의 지위를 만물의 영장으로 두는 창조론을 ‘종(種)차별주의’라 비판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러다보니 동물 등 특히 "낙지를 산 채로 요리하는 것을 규제하자는“ 정치인들의 공약도 나옵니다. 산채로 끓은 물에 넣으면 그 공포감과 고통이 얼마나 크겠냐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도 동물에 불과하다는 진화론적인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제가 진화론에 대해 이리저리 말은 하지만, 사실 진화론을 제대로 아는 바도 없고 우리의 관점으로만 진화론을 비판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에 우리의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벽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완벽한 존재는 손 델 데가 없는 100% 완성품입니다. 지적인 면, 감성적인 면, 선택하고 결정짓는 의지적인 면에서도 여타의 동물들과는 달리 완전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시던 날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입니다.
그런데, 인간 본질로는 완벽했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18절,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성경에서 처음으로 부정 용어가 나옵니다.
좋다… 좋았더라…심히 좋았더라… 6일 연속되더니 2장에 들어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좋아하지 않는’ 안티(anti)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건 창조 자체의 흠이 아니라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좋지 않는 것’을 여성을 만들고 배필로 세워 좋은 관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또 다른 선물을 주셨습니다. 흙으로 빚은 인간이 생령은 되었지만 아직은 수명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하나님처럼 영생하는 불사(不死) 불멸도 아니고 어차피 죽어야 할 불가피한 운명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언약(Covenant. 계약,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행위를 조건으로 하는 계약이라 해서 이를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행위언약의 중심이 생명과입니다. 생명나무는 불멸(不滅)의 방법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명열매를 따먹으면 수명은 길어지며 언젠가 영생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예표가 에녹입니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랐습니다.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만약에 영생에 들어서는 고난도의 방법을 제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00일 금식하라! 하루 열 시간씩 10년 기도해라! 단 하루, 한 시간도 빼먹으면 허탕이다! 날마다 채찍으로 100대씩 자신을 후려쳐라! 이런 영생조건을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하나님께서는 생명과와 함께 아담을 대표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영생으로 들어가려면 각자가 완벽하게 선하게 살아야 한다, 각자의 구원은 각자의 행위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식의 인류 구원을 제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너도나도 구원을 받기 위해 평생을 각자가 수고하고 평생을 구원받는 일에 각자가 힘쓰느라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각자만의 방법이면 가족 구원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을 주셨는데, 생명과를 따먹어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될 것이다! 아담 너만 잘 하면 너의 후손들은 네 뒤를 따라 도매금으로 줄줄이 영생한다! 아주 쉽게 인류를 영생의 존재로 승격시키려는, 이 얼마나 크신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깊은 속사랑을 모르니 사람들은 ‘왜 선악과라는 덫을 놓으셨냐?’ 불만을 터트립니다. 죄는 인간에게 부정적인 관념을 심어놓습니다. 그래서 생명과일과 대표 원리로 인간을 좋게 하시려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선악과에만 집착하느라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보고 맙니다.
생명나무
생명나무에 영생의 씨가 들어있을까요? 오늘날 그런 생명나무가 있다면 야단납니다. 생명과 열매 하나에 100억 정도 한다면… 돈 많은 사람들이 독점할 것이고 영생을 위해 별의별 살인, 도둑질이 횡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과에 그런 요소가 있으면 안 됩니다. 생명나무는 특별한 나무이지만 그 안에 영생의 씨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심벌’일 뿐입니다.
신학자 어거스틴과 칼빈은 생명과가 성자(聖子) 하나님을 상징한다 해석했습니다. 당연한 해석입니다. 생명과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 교통을 말합니다. 생명과를 따먹는 순간, 하나님과 호흡하고 교제합니다. 검은 것과 교제하면 검게 되고 흰 것과 교제하면 희게 되는 것처럼,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할수록 생명이 길어집니다.
인간은 생명과(성자)를 중보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됩니다. 설령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인간 영생은 자기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성자를 통한 구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까지 가지 않아도, 성자가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지 않아도, 피를 흘리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과정을 통하지 않아도 영생하는 길을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생명과를 따먹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교통을 통해 신령한 존재가 되고 영생할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첫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
선악과는 선악 양쪽 모두를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선과 악 양쪽에서 지식을 습득하되 특히 나쁜 쪽을 선택하게 하는 나무입니다. 선악과 역시 특별한 악의 요소가 들어있지는 않습니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선택하기에 앞서 그 선과 악을 내가 정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주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피조물 신분을 망각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선악과를 두고, 따먹지 말라!는 명령과 금지는 너보다 높은 존재가 있다, 그 존재에 맞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금지시킨 존재에 대한 거역입니다. 선악과를 보면서 피조물 신분임을 인식하고 명하신 분의 명령에 따라 사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영생의 길임을 알라고 선악과를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생명과일이 효과가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생명과는 순종과 교제입니다. 선악과가 없다면, 그래서 생명과만 따먹는 선택 밖에 없다면 순종의 의지는 효력이 없습니다. 먹을 게 없어 따먹는 것, 그렇게 생명과를 따먹는다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교제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악과는 바른 순종의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서 주신 사랑의 나무입니다.
생명과가 탐스럽게 생겼다면 선악과는 흉측하게, 마치 모과처럼 생겼을까요? 선악과는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게’(창3:6) 생명과보다도 외양은 더 맛있게, 멋있게 보였습니다. 생명과보다 선악과를 향해 손을 내밀게 하는 인기상품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선악과를 물리치고 생명과를 따먹을 때, 참된 순종, 참된 교제가 일어나고 그때마다 생명의 길이가 길어집니다. 그래서 생명과를 위해 선악과를 주신 것입니다.
깨어진 행위언약
계약에는 쌍방이 있어야 합니다. 행위계약의 쌍방은 하나님과 아담입니다. 아담은 개인 신분이 아니라 인류를 대표합니다. 이를, 신학용어로 대표 원리입니다. 계약의 내용인즉, 생명과를 먹는 순종으로 영생하며, 선악과를 택하는 불순종으로 불행을 당하게 된다! 아담의 범죄 이전 상태에서 맺었기에 계약을 이행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죄가 없는 영성 신분으로 맺은 계약이니 최고의 조건입니다.
거기다 혼자 계약을 준수하면 온 인류가 덩달아 복을 받도록 해주셨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류에게 복을 주시려고 작심하신 것입니다. 흠이라면, 한 순간의 언약이 아니라 전 일생에 걸친 계약조항이라는 것이 아담에게는 어렵다면 어려웠을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결과적으로 선악과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성자가 없는 스스로의 구원을 원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짧은 시간에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올라서도록 하는 자력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아담을 유혹했던 방법으로 미혹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제시)해 주신 구원 방법보다는 인간의 자아성찰을 통한 ‘하나님 되기’에 대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모든 인간은 신이다! 내 안에는 신의 성질이 있다. 그러기에 내 안에 신의 자아를 계발하고 깨닫기만 하면 신이 될 수 있다! 라는 주장은 인간의 가치를 상당히 높여주기에 매력적입니다.
사단은 기독교 안에 이단을 만들고 믿음이 약하고 성경교리에 어두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성경 내용에 자신의 교리를 첨가하거나 불리한 내용은 삭제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바른 진리를 듣지 못하도록 합니다. 한국교회에 특히 이단들이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 스스로 신이 되겠다! 영생하겠다는 시도가 인간복제과학입니다. 생명 복제도 바르게 사용하면 불치병, 난치병을 고치는 엄청난 진보입니다. 문제는, 인간 죄성입니다. 생명복제 기술은 하나님의 소관인 생명영역까지 도전하게 되고 자력으로 영생하려 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영생의 길을 만들어 낼 수도 없거니와 윤리와 도덕이 없는 인간복제는 돈벌이나 군사무기가 되어 흉측한 세상을 만들어낼 위험요소가 너무 큽니다.
인간복제를 통해 영생하려는 과학종교나 자력으로 영생하려는 종교 역시 선악과로 영생의 길을 찾으려 했던 아담의 시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모두 바벨탑을 쌓는 부질없는 짓입니다.
행위계약이 파기된 이후 하나님은 각자의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행위계약은 계속 유효 상태입니다. 누구든 처음의 계약처럼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의 심사에 죄와 흠이 조금도 없는 자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눈이 아니고,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온전할 수 있습니까? 타락한 인간은 단 한사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행위계약에 근거하여 심판 당하고 정죄 받을 뿐입니다. 아담 이후로 행위계약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이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놓여있게 된 것입니다.
결론
오늘의 설교를 요약하면, 행위언약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직후 최초 인류 아담과 맺으신 언약으로 일명 ‘선악과 언약’(창2:16-17), ‘율법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중심으로 말씀의 순종과 불순종의 유무(有無)에 따라 영생과 죽음을 인간 의지 앞에 놓았던 하나님의 첫 언약입니다.
행위언약의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 여부입니다(레18:5). 아담은 행위언약에서 불순종함으로 언약을 파기시켜 버렸습니다. 대가는 심판과 정죄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생의 길을 영영 놓쳐버리고 말았을까요? 구원의 길은 각자의 자기 행위로나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나무에서 영생의 길, 죄사함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새롭게 체결된 하나님의 은혜언약-십자가 나무 언약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십자가나무의 생명열매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5:20)
첫 열매는 생명의 열매요 영생의 열매입니다. 에덴에서 생명과일이 주고자 했던 영생의 열매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실패했던 행위언약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재계약과 함께 은혜언약이라는 복음 아래서 성취되고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먹는 일이요,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고 수용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나무의 열매, 예수님의 부활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일한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해주신 일을 찬양하며 그 은혜의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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