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설교

[교리야 노올자]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다(창세기 1:26~28)

갈렙처럼 2025. 4. 15.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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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일보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다

창세기 1장 26~28절

 

 

서론

인간 기원을 말할 때 창조론적 기원설과 진화론적 기원설이 있음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과학이고 창조론은 신화다.” 라고 오해합니다. 과학의 뒷받침을 받는다는 진화론도 우주가 생성될 때 직접 본 사람이 없었고 사람이 아메바에서 지금 인간, 사피엔스로 진화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거나 기록한 ‘팩트’도 없습니다.

 

창조론 역시 직접 본 사람은 없으되 3,500년 전에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창조의 문서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진화론보다 상당히 사실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조론적 과학’이냐 ‘진화론적 종교냐’…, 그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인간의 기원이나 존재 가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라 말합니다. 질문은 생각과 언어에서 나옵니다. 동물에는 그런 특성이 없기에 인간사회에서만 문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저렇게 창조적인 사고로 세계 문명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성장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꾸 창조적인 질문을 습관화해야 합니다.

 

헬라인은 인간을 ‘안드로포스’, ‘위를 보는 존재’로 규명합니다. 동물들은 아래로 보고 사는데 사람만이 직립(直立) 보행으로 위를 보도록 되어 있다! 동물은 땅에 속하나 인간은 하늘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위에서 났다는 것이니 헬라인들은 성경적 인간론을 일찍 깨달았던 것입니다.

 

중국인은 사람을 ‘인(人)’이라 규정합니다. 둘이 모여 하나가 되는 형상, ‘서로 함께 하는 존재’,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규정한 것입니다. 충과 효를 인간의 으뜸으로 생각하는 유교가 토대가 되는 중국에서는 상당히 현실적인 인간론을 말합니다.

인간 창조는 고운 흙, 동물 창조는 거친 흙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최고의 위치, 면류관을 차지하는 피조물이라 합니다. 만물들은 ‘가라사대…’ 말씀하심으로 창조했지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손수 흙을 빚어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인간 창조와 동물 창조의 재료는 모두 ‘흙’입니다.

 

2장 7절,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19절,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우리 성경에는 같은 ‘흙’이지만 히브리어에는 ‘흙’의 성질이 다릅니다. 인간 창조의 ‘흙’은 ‘아파르’, 먼지 같이 부드러운 입자입니다. 흙을 갈고 채로 쳐내 곱게 가루를 만든 흙입니다. New KJV에는 인간을 만든 7절의 ‘흙’은 ‘dust’, 먼지, 티끌, 가루 분말입니다. 굉장히 세밀하고 섬세한 흙입니다. 동물 창조의 흙은 ‘아다마’ 거친 입자로 사람의 보살핌이 없는 거친 땅, ‘ground’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만든 흙과 동물을 만든 흙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도 부드럽고 미세하고 영양가 있고 촉촉한 흙으로 온 정성을 다해 눈과 코와 신경과 관절과 골수와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손수 빚었습니다. 그래서 심장이 뛰고 손가락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것입니다(31절). 자식을 낳고 그 신기함에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하는 부모의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로봇을 만드는 것처럼 제작하고 조립한 것이 아니라 가장 고운 흙, 생산성이 높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아름답게 만드셨고 그만큼 애지중지하셨습니다. 인간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빚으시고 다듬어 가시며 가장 아름답게 걸작품을 만들어 내십니다. 흙의 차이만으로 인간이 최고는 아닙니다. 동물 창조와는 달리 한 가지 동작을 더하십니다.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형상’이라는 단어가 연달아 등장합니다. ‘모양대로’까지 하면 네 번이나 계속됩니다. 히브리어에서 단어의 반복은 강조점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形象), 즉 이미지(image)요 모양(模樣)은 폼(form)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하늘님, 하느님은 대부분 육체적 모습을 띕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면, 얼굴 모양, 손과 발… 등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음 받았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기가 출생할 때 부모의 모양을 좇아서 태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靈, 요4:24)이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약1:17).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그 모양에 숭배도 말라, 하십니다(출20:4).

육체의 형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여 태연하게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내 자손들이 나를 섬긴다며 나와는 전혀 다른 송아지나 사자의 형상을 조각해 놓고 제사를 드린다면 기분이 좋을까요?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은 모욕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보이는 육체의 형상이나 모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언제든 성육신하시는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형체와 조직을 하나하나 정성껏 빚어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무엇인가요? 어떤 학자는 ‘형상’은 육체와 관련되고 ‘모양’은 영혼과 관련되었다 봅니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형상은 영혼의 지적인 특성이요, 모양은 도덕적 특성이라 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형상과 모양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동의어로 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의 모습은 없지만 영적이면서, 인격적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닮아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2:7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하나님의 생명력입니다. 이 생명력이 육체에 들어가니 인간은 생령, 움직이는 생물이 되고 영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불멸성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신체는 흙으로 지음 아 유한적이나 영생의 가능성을 지닌 영적존재가 된 것입니다. 짐승이나 새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에 육체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사멸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창조는, 하나님의 성품을 담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공유적 속성들-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단순성은 흙덩이에게 심어주지 않았습니다. 이건 하나님만의 절대적인 속성으로 이걸 심어주었다면 우리도 신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나눠준 것은 지혜와 지식, 공의, 거룩, 선, 사랑, 진실, 주권… 등 공유적 속성입니다. 에덴동산의 사람은 짐승과는 달리 이런 성품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범죄 이전의 아담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초기의 인간을 짐승 수준이라 합니다. 말할 줄도, 감정 표현도 단순한, 원숭이 수준으로 보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동물적 인간관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성경은, 첫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에 인간 초기부터 인간의 심적(心的)인 3요소가 되는 지(知), 정(情), 의(意)를 완전하게 완벽하게 소유했다고 합니다.

 

*아담의 지적 능력. 동물과 각종 새 이름을 작명했습니다(창2:19). 생물의 특성과 기능을 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지적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지적 능력이 투영된 결과입니다.

 

*아담의 정서적 능력. 하와와의 첫 대면에서 한 눈에 사랑에 빠져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 이 멋진 사랑의 고백을 아담이 한 것입니다. 아담은 결코 원시인(原始人)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정서적 감정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담의 의지적 능력. 아담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결정하고 결심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짐승에게는 본능, 본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담에게 이런 의지적 능력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생물에게는 없는 특질이 있습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영혼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라는 속성이 있어 인간의 가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인간을 영혼으로 환산하면 그 가격은 어마어마합니다. 통치자들은 나라를 희생하면서라도 영생을 얻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은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라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아주 좋은 최고의 재료로 만든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최고의 사랑과 기대를 갖고 만든 작품입니다. 열 달 동안의 기다림과 기대의 소산물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런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나는 최고의 재료로 만들어 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라는 자존감, 고귀한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행복한 자존감

엊그제(20일) ‘세계 행복의 날’을 맞아 발간한 ‘2023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이 스스로 매긴 ‘주관적 행복도’ 점수 평균은 10점 만점에 5.951점으로 조사 대상 137국 중 57위였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국 중에선 그리스와 콜롬비아, 튀르키예에 이어 뒤에서 넷째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핀란드가 1위이면서 북부 유럽국들이 상위권을 차지하는데 우리는 왜 이 좋은 금수강산에서 살면서도 정작 행복을 누리지 못할까요?

 

이런 이야기 밖으로 나가면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단군설화가 주는 인간의 기원이 안 좋아서 우리는 행복하면서도 행복임을 몰라 그런 건 아닐까요? 단군설화는 우리 조상이 환웅과 웅녀, 곰입니다. 실제로 곰은 지능이 매우 높다하지만 둔한 사람을 가리켜 “곰같이 둔한 놈”, “미련 곰탱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아둔한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의 형상에 두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습니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우울증이 없습니다. 자존감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톰 에딩턴 교수는 우울증의 원인을 “나는 사랑 받지 못한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두 가지 원인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인간의 성격을 두고 인격(人格)이라 합니다. 인격을 한문 그대로 풀어보면 ‘사람의 가격’이 아닐까요? 사람의 가격은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냥 살다 죽으면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 살다 가면 고기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두뇌를 사용하다 가면 세상에 유익은 끼쳤어도 내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그 값을 쳐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눈에 보이는 인격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품격에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마운트홀리오크칼리지의 총장이었던 메리 올리는 “인격은 교육의 주된 목적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에 얼마나 유익을 끼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그 사람의 가치를 평하는 것은 유물론적이고 진화론적 인간론입니다. 창조론적 인간론은 그 사람의 능력과 사회에 끼치는 공헌도를 떠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기에 모두가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잘못된 것은 인간 영혼의 본질적인 존엄을 모욕하기 때문입니다. 성폭행은 물리적인 신체에 가하는 폭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격과 영혼은 누구든지 모욕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만으로 존엄을 유지해야 하고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형상 인격이기에 귀하고 소중하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나에게서 가장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나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이런 자존감으로 우리가 살 수 있기에 기독교신앙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이런 신앙심을 선물로 주신 주 하나님께 당연히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결론

미국 대학에서 진화론반과 창조론반을 놓고 실험을 했습니다. 몇 달 후 행동변화를 살펴보니 진화론반은 점점 동물적으로 변하고 창조론 학생 반은 품위 있게 변해갔습니다. 미생물에서 나왔다면 인간에게는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은 우연하게 흘러가고 있고 나 역시 우연히 세상에 왔기에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내세는 더욱 불확실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엄성은 왜 찾는 것이며 인간에 대한 예의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예정과 사랑 가운데서 지구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자체가 최고의 선물입니다.

 

김남조 시인은 “인생은 누구나 한 번밖에 초대받을 수 없는 자리”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지구 여행에서 왕복표를 받지 못하고 편도표만 받았다는 말이겠지요.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소중한 나의 생애! 동물에서 진화된 나의 자화상으로 살 것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인 나의 자화상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우연히 왔다 우연히 흘러가는 인생의 고아로 살 것입니까? 세상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것입니까?

 

어느 쪽이 내 인생을 더 풍성하게 해 줄까요? 바른 한쪽을 선택함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바르게 세워나가며 행복한 자존감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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