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원리
로마서 3장 10절
인간은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고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는 길보다 선악과를 취하여 형벌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최선의 환경에서 최악의 상태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행위를 통한 계약을 굳게 서약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생명의 축복을 누릴게 될 것이며, 만약 불순종으로 어겼을 때에는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께서 내민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대표원리라고 합니다. 대표원리-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으셨는데 아담이 바로 인류의 대표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명령에 순종하면 그 자손은 저절로 명령에 순종한 것이 되어 아담에게 주시는 축복(영생)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만약에 아담이 불순종의 죄로 하나님의 계약을 파기하면 그 자손도 함께 형벌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표원리에 아담은 좋다! 고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먼저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와는 왜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추론해 봅니다.
㉠ 사단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사단은 ‘간교’(창 3:1)한 존재입니다. ‘간교’의 본래 의미는 ‘영리하고 멋진’입니다. 사단은 천상에서 멋지고 영리한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천상의 천사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사단으로 둔갑하게 되었을 때 그의 영리는 사악함으로 떨어졌고 ‘멋진’ 모습은 유혹의 도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영리하기에 뱀을 유혹의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뱀은 에덴에서 가장 매끈하고 영리한 애완동물이었습니다. 형체를 따라 마음대로 감기고 어우러지고 비늘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빛깔은 하와와 한 가족처럼 생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와가 자식이 있습니까, 함께 수다를 떨 친구들이 있습니까? 시어머니도 없는 외로운 존재였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하와에게 사단은 뱀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밤중에 나타나는 뱀의 모습은 빛 자체였습니다. 뱀은 유일하게 기어 다니기도 하고 꼬리를 땅에 세우고 직립의 모습으로 다니기도 하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그 모습은 하와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뱀이 하와를 유혹합니다.
“너도 나 같은 빛나는 모습의 존재로 변할 수 있다! 너는 관리자로 만족하겠느냐? 창조주가 되고 싶지 않느냐? 태양과 달과 별들을 만들고 통치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느냐? 지금의 삶으로 만족하겠느냐?”
이런 식의 유혹은 하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하와는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자기도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창조주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 하와는 하나님의 계약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계약은 생명과에 있지만 생명과 대신에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잔인성, 끔찍성… 등을 하와가 알았다면 무슨 배짱으로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실 때 하와는 명령을 받는 장소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하게 분명하게 명령하시는지 하와는 그 명령의 중요성, 그 계약의 중요성을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이 되어버리면 동등자가 될 텐데 형벌은 무슨 형벌? 설령 신이 되지 못해도 아무렴 이걸 따 먹는다고 에덴에서 추방하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덥석 받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가벼움성(?)이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 아담이 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하와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2,3)
하와의 말에서 몇 가지 사실적이지 못한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만지지도 말라”-하나님께서는 그런 명령을 내리신적이 없습니다(창 2:16, 17 참조). “죽을까 하노라”-하나님은 죽음에 대한 사실성을 강조하셨습니다(창 2:17). 그런데 하와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 라고 가볍게 대답해 버립니다. 선악과에 대해 별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선악과에 대한 하와의 가벼운 판단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담이 그렇게 가볍게 전달을 했을까요? 여러분 생각에는 세 가지 추론 중 어떤 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도 사단은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 혹은 미혹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혹은 제시)해 주신 구원의 방법보다는 인간의 자아성찰을 통한 ‘하나님 되기’에 대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갑니다. 모든 인간은 신이다! 모든 인간 속에는 신의 성질이 있다. 그러기에 자신 속에 있는 신의 자아를 계발하고 깨닫기만 하면 신이 될 수 있다! 이런 자력종교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인간의 가치를 상당히 높여주기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입니다.
또한 사단은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도 이단(異端)을 만들고 하와를 유혹했던 방법으로 믿음이 약하고 성경교리에 어두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들은 성경 66권으로 모자라 성경의 내용들에 자신들의 교리를 첨가하거나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들을 삭제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진리를 듣지 못하도록 합니다. 한국교회에 특히 이단들이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행동의 죄와 생각의 죄
어떻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했습니다. 인간은 체결된 쌍방의 계약에 따라 죄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왜 죄인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인이 되었다!”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하자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잖아요? 생명과에도 영생의 요소가 없는 것처럼 선악과에도 죽음의 요소, 죄의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 수단일 뿐입니다. 즉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은 선악과를 따 먹은 그 ‘행동’ 때문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마음에서 선악과를 따먹기로 마음먹은 그 ‘생각’이 이미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무엇인가, 선악과를 따먹은 ‘몸의 행동’이 죄이기 이전에 ‘불순종의 생각’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죄는 생각에 있습니다. 행동의 죄는 생각에 따라오는 죄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유치한 사람은 행동의 죄를 중시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생각의 죄를 더 두려워합니다. 구약은 행동의 죄를 지적합니다. 십계명의 많은 경우, 행동의 죄입니다. 율법도 행동의 죄들을 많이 지적합니다. 살인, 도둑질, 부모 불경(不敬), 이웃을 해치는 일… 등은 행동의 죄입니다. 아무리 생각 속에 죄가 들어있어도 행동화하지 않으면 율법으로는 죄인으로 정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생각의 죄를 더 지적하셨습니다. 간음-율법은 남여간의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예수님은 음욕이라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간음죄가 성립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살인죄의 경우나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직접 생명을 살해해야 살인죄이고 물건을 훔쳐가야 도둑질에 해당되지만 예수님께서는 남을 미워하는 ‘생각’만으로 살인죄가 성립되고 남의 것을 탐내는 ‘생각’만으로도 도둑질을 한 행위와 같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논리라면, 예수님도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에 무게를 두지 않고 신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미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인이 아니라 따먹으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미 죄인이 된 것입니다.
불순종 그 이후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이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식언(食言)치 않으시며 변개(變改)치 않으십니다. 자신의 언약을 분명하게, 끝까지 지키는 분이십니다. 아담 쪽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고 말았으니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아담이 져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의 원리와 동일합니다. 양자간에 계약이 체결되었을 때에 파기한 자가 모든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체결했던 행위계약에 의거하여 아담에게 행동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인류 역사에 불행이 시작됩니다.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사망이 오고 땀 흘리는 수고와 고통이 따랐으며, 그렇게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원래부터 인간은 흙이었습니다. 흙덩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 존재에게 놀라운 은총과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영적 존재인 생령이 되게 하셨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생명까지 공유할 수 있도록 생명 열매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생명의 경지에까지 올라서려고 했습니다. 사탄의 전철을 밟은 것입니다. 그 결과는 사탄이 저주를 받아 하늘보좌에서 내쫓김을 당했듯이 인간 역시 사망의 형벌을 선고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령이 다시 흙덩이로 낮아져 버리던 날, 오호라! 이 날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도 비참한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이 죄인의 신분으로 떨어졌고, 천국 자체는 아니지만 천국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영적 죽음이 왔고, 인생고(人生苦)가 뒤따랐습니다.
행복한 인간에게 닥쳐온 인생고의 불행. 이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마치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건물에서 쫓겨나고 어두운 길바닥으로 내팽개쳐져 슬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일은 계약의 한쪽이었던 주인을 원망하거나, 힐난할 성질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계약을 파기해 버린 쪽에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계약이 파기된 이후 하나님은 모든 인간은(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제외)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행위계약은 계속 유효합니다. 누구든 처음의 계약처럼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의 심사에 죄와 흠이 조금도 없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사람의 눈이 아니고,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누가 온전할 수 있습니까? 타락한 인간은 단 한사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행위계약에 의하여 심판 당하고 정죄 받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행위계약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이 형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놓여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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