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과잉근심사회, 어떻게 살아낼까?(요한복음 14:1~4)

갈렙처럼 2025. 2. 9.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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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근심사회, 어떻게 살아낼까?

요한복음 14장 1~4절

 

 

서론

2020으로 시작되었던 코로나19가 대한민국은 물론 한국교회를 강타했습니다. 이전 전염병과는 달리 신천지집단의 대규모 감염으로 시작되었기에 한국교회는 대다수의 교회들이 주일에 예배당을 닫았고 예배를 중단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불가피했지만 불행한 처신입니다.

 

모든 전염병의 특징은 불안도 함께 퍼트립니다. 긴급재난문자는 ‘긴급’이란 말로 수시로 스마트폰에 도착합니다. 제 핸드폰에 들어온 재난문자는 현재 143개입니다. 마스크는 서로의 표정을 숨겨버립니다. 확진자 주변은 격리되고 회사나 교회에 민폐를 끼치니, 더 불안합니다.

 

서울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는 매년마다 ‘트렌드코리아’라는 단행본을 냅니다. 지난해 소비자들의 동향을 분석하고 올해 소비자들의 동향을 예측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매년 꼭 읽습니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다음해 메르스가 발생하면서 온 국민이 불안했을 때 <트렌드 코리아2016년>판은 그 해 트렌드를 ‘과잉근심사회’가 될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근심에 과잉적으로 반응해서 있는 근심, 없는 근심을 불러내어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2016년에 예측한 ‘과잉근심사회’ 트렌드는 2020년 지금에 오히려 더 적합한 예측이 되고 있습니다.

 

근심은 어떤 일로 속을 태우거나 우울한 상태입니다. 불안은 조마조마한 심리입니다.

근심과 불안은 인류역사와 함께 합니다. 세계적으로 10억 명 이상이 불안장애를 앓고 삽니다. 진화론의 찰스 다윈도 공황장애와 특정 공포증도 앓았습니다. 선악과 먹은 아담부부는 불안으로 숨었습니다(창3:8). 가인은 동생을 살인하고 추방될 때 사람들에게 보복당할까 불안해합니다(창4:14).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근심이 컸습니다(창21;11). 이삭은 장남 에서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자 근심이 생겼습니다(창26:35). 성경에서 사람의 근심을 찾아보면 아주 많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도 인간 창조를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 기록합니다(창6;6).

인간의 근심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에게도 감히 근심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근심 역시 하나님 계획안에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근심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직진 인생으로 살아가다 좌우를 살펴보고 조심하면 그만큼 사고가 덜 납니다. 자녀에게 근심이 있어야 자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근심거리는 인간의 한계상황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될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봉하는 믿음의 동기가 됩니다. 근심도 나름대로 써먹을 게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근심 과잉입니다. 코로나19는 이전 전염병들보다도 국민들 근심이 과잉상태입니다. 과잉(過剩)은 필요한 수량보다 많아 남아도는 경우로 ‘지나침’이요, ‘초과’입니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폭동 내지 시민운동도 백인 경찰이 흑인에 대한 과잉진압에서 발생된 것입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진압도 과잉이 되면 질서 유지가 아니라 인간성을 말살합니다. 그래서 과잉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넘쳐서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전염성 바이러스가 두렵고 불안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불안이 한도액을 넘었습니다. 바이러스로 근심할만한 분량이 100에 50이라면 우리는 120을 근심합니다. 그래서 과잉근심사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과잉근심은 지나친 건강염려증에 빠지게 됩니다. 코로나의 전염병보다 과잉근심이 우리의 건강과 정서를 더 해치고 집단우울증에 걸리게 합니다.

 

1985년 미국에서 최초로 인공신장을 이식 받은 환자 쉴러드가 루이빌병원을 퇴원할 때 수술 담당의 렌신 박사에게 기자가, 인공 신장을 달고 몇 년을 살 수 있겠냐? 물었습니다.

 

렌신:“기계는 문제가 없다. 다만 환자가 마음에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면 오래 살 수 있다.”

 

의사들은 퇴원하는 환자의 재발을 어느 정도 짐작한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간 환자는 다시 오지 않지만 “재발이 없을까요?” “합병증 없나요?” 지나친 근심과 조바심으로 전전긍긍하는 환자는 2년 내에 대부분 병원을 찾는답니다. 병이 마음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면 큰 병도 견디지만 조급하고 초조하면 나을 병도 낫지 않습니다. 여기에다 과잉근심이 보태지면 믿음도 자라지 못하고 우울합니다.

 

과잉근심은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등을 말씀하시고 잠시 떠나겠다, 하십니다. 고별설교는 가룟 유다가 나간 직후입니다. 앞장 13장에서, 18절 “내 떡을 먹는 자가 내 발꿈치를 들었다!” 21절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38절, 배신을 예고, 36절, “나의 가는 곳에 너희들은 따라 올 수 없다!” 하십니다.

제자들 근심은 세 가지입니다.

-예수님과의 이별 통고로 맨붕 상태입니다. 제자그룹은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00% 예수님 중심으로 운영되는 조직입니다. 리더가 없으니 와해됩니다. 당연히 근심이지요!

 

-가룟 유다, 3년을 함께 한 동료의 배신은 충격입니다. 유다는 로마관리들을 끌고 우리들을 체포하러 오지 않을까? 다음에 다시 배신자가 나오는 것은 아닌가!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의 미래는…? 아니, 내 생명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염려하며 근심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4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헬라어 원문에는 ‘너희가’는 단수입니다. 11명 모두 근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뿐입니까? 찬송가에도(369장)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의 보편화를 말합니다.

 

주님의 책망은 제자들의 ‘근심’이 아니라 ‘과잉된 근심’을 지적한 것입니다. 인간감정에 희로애락을 심어놓았는데 어찌 근심 없이 살 수 있습니까? 근심 때마다 지적하면 숨이 막힙니다.

 

주님의 책망은, 과잉근심을 겨냥합니다. 제자들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상상하고 근심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끝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천국에 가셔도 대신할 보혜사를 보내십니다. 천국에서는 제자들의 처소를 예비하시며 상급도 준비하십니다. 주님과 동거도 좋지만 큰 그림을 보면 스승이 떠나시는 것이 모두에게 훨씬 유익합니다. 성령이 오셔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시대마다 나라마다 교회 역사에서 개인적으로 활동하시며 구원받게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한쪽의 상황만 봅니다. 스승의 떠나가심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은 놓치고 부정적인 측면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별의별 걱정거리를 다 만들어 냅니다. 걱정이 과잉입니다!

 

주님이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 보혜사는 누구인가? 보혜사가 스승만한 능력이 있는가? 보혜사는 다른 유능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우리는 ‘팽’ 당하는 것이 아닐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닭 좇던 개가 되어버린 것처럼…. 이런 저런 안 좋은 상황들을 불러 모으고 수집하고… 있는 염려 없는 염려 모아다 근심을 시작합니다. 너무 많아 과잉근심입니다.

 

과잉근심은 더 큰 근심의 알들을 낳습니다. 이런 현상을 ‘램프증후군’이라 합니다. 동화 속 알라딘의 마술램프에서 마법의 거인 ‘지니’를 깨워내듯 실현가능성 없는 걱정들을 램프에서 불러내 끊임없이 근심하고 염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현상이 램프증후군, 과잉근심입니다. 걱정의 마술램프를 달고사는 과다걱정증후군입니다.

과잉근심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과잉근심은 부작용이 큽니다. 큰 근심은 전기에 감전되어 급사할 정도의 위력입니다. 작은 근심도 누적되면 심장병이 됩니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성인병이 심장병입니다. 심리학에서는 근심을 ‘느린 형태의 자살’이라 합니다. 근심은 서서히 자신을 죽여 가는 것입니다.

 

-과잉근심은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자신을 평안하게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온갖 불안한 상황들을 만들어 내고 불러오고… 그렇게 자기를 스트레스로 고문합니다. 근심이 없으면 근심이 없음을 근심합니다. 왜냐? 아무 근심이 없다가 큰 거 맞을까, 지레 근심하는 것입니다.

 

-과잉근심은 사회적 문제를 노출시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분노입니다. 대한민국의 분노는 도를 넘은지 오래입니다. 중간소음 등의 문제로 이웃 간에도 분노 범죄가 일어납니다. 포털검색창에 ‘홧김에’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몇 만 건에 이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해서 생긴 우발적인 사건들입니다. 근심이 낳은 충동조절장애들입니다.

 

그러니, 근심을 마음에 보관해주면 안 됩니다. 자꾸 좇아내야 합니다. 밭에서 새들을 쫓아내듯 근심이 아예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내 마음이 과잉근심의 창고가 되지 않게 막아야 합니다.

 

헬라어로 ‘근심’은 ‘나눠진다’입니다, 두 마음이 내 안에 공존하는 것이 근심입니다. 주님 쪽으로 붙으면 근심이 줄어들고 상황 쪽으로 붙으면 커집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생각과 세상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나뉘고 예수님의 생각과 자기 생각으로 나뉘어 주님 없이 견딜 수 있을까, 젖 뗀 아기처럼 불안해요. 제자들끼리 의심하며 나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믿으라…. 믿음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근심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벽지는 약하지만 기둥에 붙으면 강해집니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15장 포도나무의 비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근심으로 나뉘면 안 됩니다. 아교풀로 붙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붙어 있다 어려움이 닥치면 오히려 나뉩니다. 하나님과 떨어진 근심의 마음에 불안, 초조, 염려가 파리처럼 달려듭니다. 근심 파리 떼들이 달려들면 마음도 상하고 얼굴도 상하고 믿음도 약해집니다. 그러기에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나팔꽃이 나무 기둥에 감기며 하나가 되어 비바람에도 살아남듯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근심이 과잉상태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결론

독일 괴팅겐 의과대학 교수이며 불안 연구가인 보르빈 반델로브는 <불안 그 두 얼굴의 심리학>에서 심각한 불안은 사람의 수행능력을 저하시키지만 적당한 수준의 불안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원동력, 탁월한 업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무한한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유명한 예술가 중에는 늘 자기 작품이 실패할까, 연주가 악평을 받을까 근심하며 염려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더 뛰어난 음악가가 되려고 더 노력하고 독창적인 자기 예술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실패, 인기가 떨어지는 것,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배우, 작가, 화가, 스포츠 스타, 정치인, 학자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으로 오늘도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제 불안은 예배가 중단되지 않을까, 석 달 넉 달 예배 출석을 중단한 초신자 성도님들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까, 오래 믿었던 분들조차 주일성수 신앙이 무너지고 믿음에 뒷걸음질을 하지 않을까… 오늘도 근심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

아버지만 믿어! 엄마만 믿어! 대통령이, 나만 믿으세요! 그래서 아빠엄마에 대한 신뢰,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가 강화되었다면 코로나19는 불안의 긍정적 측면을 살려준 좋은 선물입니다. 불안감은 인간을 더욱 성실하게 겸손하게 우리 믿음을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기에 이제 건강정보, 입시정보에 너무 기대어 과잉근심으로 '느린 자살'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적절한 근심으로 걱정의 긍정적 에너지를 살려낼 수 있는 믿음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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