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찬양에 대한 미갈의 오해
사무엘하 6:20~23
한국의 예배 분위기는 솔직히 다윗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미갈의 편에 선다. 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중에 다윗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또는 교회 앞 마당에서 스스로 도취되어 이렇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면, 우리는 대부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갈처럼 그 사람을 비난하고 꾸짖을 수밖에 없다.
“어찌 감히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몸을 드러내 보이며 춤을 출 수가 있겠는가?”
성경은 분명히 미갈의 행위를 옳지 못하다고 증언한다.
다윗의 행위에 대해 그 정당성을 인정한다.
미갈의 잘못은 무엇인가?
1)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정죄한다.
예배란 하나님의 구속과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음악은 예배 행위 중 일부로 응답에 속한다. 이러한 응답은 인간이 처한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알지 못하는 예배 문화나 음악에 접하면 '틀린 것'으로 정죄하는 우를 범한다. 이것이 미갈의 잘못이다.
2) 회중예배 행위와 음악을 비판했다.
미갈은 공주로서 궁중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아버지도 남편도 왕이다. 왕실음악은 엄숙하다. 다윗은 평민 출신이다. 평민들의 춤과 음악에 익숙해 있었다. 다윗이 법궤 앞에서 행한 가무(歌舞)는 어렸을 적부터 몸에 익은 것이다.
다윗은 왕이 되어도 평민과 왕이라는 것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생각지 않았다. 그는 너무 흥분하고 기쁨에 도취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왕의 옷을 벗고 평민이 되었으며, 왕이 아닌 민중으로 돌아가서 춤추고 노래했다. 미갈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3) 예배자의 중심을 이해하지 않고 외부의 가무(歌舞) 행위를 비판한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모신다는 것이 너무도 기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감사와 감격과 흥분과 기쁨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예배 행위를 여호와 앞에서 표현한다. 미갈은 이와 같은 다윗의 중심을 파악하여 그 행위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행위를 기준으로 비판하다. 다윗의 속마음을 자기마음대로 재단(裁斷)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중심에 대한 표현은 민중적일 수도 있고 전문적인 것일 수도 있다. 중심이 중요하다.
4) 삶과 예배를 분리시킨다.
다윗에게는 예배와 삶 사이의 이원론적 구분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그 삶 자체가 예배하는 삶이었다. 예배 안에서도 예배 밖에서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동일하게 살았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익혔던 가락과 춤과 악기들을 하나님 앞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의 표현을 그대로 삶에까지 연장시킬 수 있었다.
예배의 자리는 성(聖)스럽고 삶의 자리는 속(俗)되다고 생각하는 미갈은 다윗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예배의 자리만큼이나 성(聖)스럽고 귀하다는 생각 속에서만이 우리는 다윗과 성경의 증언을 이해할 수 있다.
(문성모 목사의 글을 일부 발췌해서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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