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크리스천
사도행전 5:1~6
오래 전 <이코노미스트> 경기도지사 손학규씨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그 제목은 “경기도의 힘”입니다. 김지사는 “동북아 경제중심의 경기도 역할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은 “강원도의 힘”이라는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저는 늘빛교회의 청년의 힘을 말하고 싶습니다.
청년들은 굉장한 에너지입니다. 우라늄은 원자폭탄의 재료입니다. 어마어마한 폭발력 보입니다.
청년들은 내일의 시한폭탄입니다. 지금 터지면 그 효과가 약합니다. 내일에는 엄청난 에너지를 보이기에 청년의 힘이 있는 교회는 내일에 폭발합니다.
그러기에 청년들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여러분들이 만들어 가는 청년의 힘은 늘빛교회의 내일의 힘입니다.
1. 청년들은 교회관이 바로 서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심을 가져달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교회의 문제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가 폭발적인 출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위선과 여기에 대한 사도의 응징-성령 충만한 교회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요?
타락한 교회, 문제가 많은 교회, 세속화된 교회라면 모를까? 유무상통을 하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에 상당히 모범적인 신앙심을 보이던 부부 집사가 문제를 야기 시켰습니다.
아나니아-“하나님의 은혜”
삽비라-“아름답다”
이런 부부라면 젊은 사람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영향력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탐욕을 보인 것입니다. 그들을 존경했던 것만큼 젊은이들은 실망이 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처사도 너무 가혹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절반만 바쳐도 그만하면 된 것 아닌가요? 경고 정도로 끝나면 될 것을 저주하고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교회는 실수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인가요? 기회는 다시 주어질 수 없나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 필요한 것인가요?
여기서 젊은이들은 상당히 실망하고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젊은이들, 그들은 묵묵히 6절, 시신을 매고 나가 장사했습니다.
여기에서 젊은이들의 교회관을 봅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교회는 완전히 성화된 곳이 아닙니다. 별의별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도자들에 대한 권위도 인정했습니다. 지금 싹을 자르지 않으면 교회가 치명적인 손상과 변질을 가져옵니다. 이 사건은 사랑이 아니라 공의(公義)가 필요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청년들은 교회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의 그릇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은 사도들의 손과 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좋은 일꾼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아직 완전한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젊은이들의 이해심을 기대합니다. 정의로움이 최고로 달한 여러분들에게 교회가, 중직자들이, 목회자가 보여주는 태도는 자칫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었듯 교회를 통해 주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교회 안에서 교회의 속성을 이해하며 신앙생활을 할 때 더욱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교회는 신앙인에게 가정과 같습니다. 가정이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뛰쳐나간다면 어디에서 우리가 사랑을 알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요?
장년들의 신앙양태에 대해 늘 이해하고 교회가 하는 일에 수용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정결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2. 청년들은 신앙관이 바로 서 있기를 바랍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죽었을 때 왜 젊은이들이 일어났을까? 힘이 있어서!
그들이 자원해서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지시에 의해, 시신을 운반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장년들도 있는 데 왜 청년들에게 지시했을까요?
㉠ 진실한 믿음을 보았을 것이다. 이 사건의 중심은 탐욕, 위선 비(非) 진실입니다.
누가 교회 안에 들어온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일에 합당한 자들이 되는가요? 지금 장년들-교회 안에 들어오기는 했어도 거의 초신자입니다. 그들 속에는 제2, 제3의 아나니아가 많습니다.
“감추었다”는 “제 몫을 떼어놓았다”-절반의 진실, 절반의 헌신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보다는 청년들이 더 깨끗합니다.
베드로는 청년들에게 기대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청결하게 하는 자들은 청년들임을-청년에 대한 베드로의 신임을 보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분위기나 시대 조류에 휩쓸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휩쓸려도 깨어있어야 믿음입니다. 청년들에게는 이런 용기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부르심에 예! 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불렀을 때 예! 하고 선한 일에 나설 수 있는 사람-그들이 바로 젊은 사람들입니다.
청년의 시절에는 헌신의 기회가 많습니다. 이때 헌신을 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쓰임을 받는 사람들-기독교 2천년 사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청년입니다. 청년시절에는 이상이 높기에 예! 하고 대답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청년을 부르십니다.
1904년 어느 가을, 슈바이처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초록색 표지의 잡지를 보았습니다. 파리선교회의 월간소식지였고 그 안에는 “콩고 선교의 필요”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기사는 이렇게 끝나고 있었습니다.
<왕의 물음에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교회에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 기사의 몇 줄이 슈바이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슈바이처는 자신이 아프리카로 부름 받았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여 박사가 되었고 52년을 프랑스령(領) 적도 아프리카의 정글에 자신이 직접 세운 작은 병원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청년기에 가장 많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이때가 지나가면 헌신은 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결혼과 부양할 가족들이 있다는 것-우리의 헌신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청년의 시대는 많이 헌신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 헌신은 우리의 삶에 농축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농축된 청년의 헌신 속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 그들은 행동파들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라인이 있습니다. 행동파(열정)와 실력파입니다.
행동파-베드로, 엘리야, 엘리사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행동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실력파-모세 오경을 기록한 모세는 당대의 엘리트, 다니엘-총명한 사람, 예레미야, 에스겔 등은 당대의 실력파. 바울과 누가도 실력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두 라인의 사람을 쓰십니다. 진짜 행동파가 되든지 아니면 진짜 실력파가 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행동파를 원합니다.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자들만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지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사회에서는 실력파들을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청년 시절에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청년의 시기는 금과 같은 시간입니다. 시간을 허송하지 마세요.
한 청년이 강둑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돌을 강물에 던지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던졌습니다. 마지막 돌을 던지려 했을 때 그것은 돌이 아니라 황금이었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황금을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시간은 황금입니다. 이 시간을 활용해야 합니다.
3. 청년들의 개혁관이 바로 서 있기를 원합니다.
청년들의 특징은 피가 뜨겁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피로 큰일을 치러냅니다. 그래서 민주화의 선봉에 섰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피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현재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해서 교회가 키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현재의 교회 문제를 여러분의 시각으로 다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의 일들을 여러분들이 다 해결하려고 나서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배움의 과정에 있습니다. 더 많은 세상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개혁운동에 나서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여러분 스스로가 상처를 받습니다.
본문의 젊은이들-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나섰다면 초대교회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개혁 일선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부름꾼으로 자처했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개혁적 사고가 아니라 영감이 필요합니다. 내가 뭔가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감을 구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영감을 구했습니다.
영감-“영” “생명”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호흡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엘리야의 시체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습니다.
이것이 영감을 구한 자들과 개혁을 외치는 자들의 차이입니다. 영감을 구하는 자들은 자기의 때를 기다리고, 시대를 기다립니다.
지금도 교회의 개혁을 외칩니다. 자신들이 개혁의 선봉에 섭니다. 교회의 문제가 생기면 인터넷에 별의별 욕설을 다 올린다. 세습 문제가 생기면 그 앞에 가서 시위합니다. 그보다 더 악한 사람들이 되어버립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개혁은 자신을 개혁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 교회는 개혁하고자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개혁되어져할 문제점입니다. 그러나 청년의 때는 모릅니다. 당장 개혁하고자 나섭니다. 피가 뜨겁기 때문입니다.
한 노인이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를 개혁하자는 취지의 새 물결운동의 최 일선에 섰던 저명인사입니다. 산책길에서 그를 아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젊은이는 노인을 알아본 젊은이는 존경의 목례를 보낸 후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젊었을 때는 하나님께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달라는 기도를 했지.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 가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던 중년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나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기도했네. 그러나 인간의 우둔함을 깨달은 지금에는 그 어떤 변화보다 나를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네.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다면 아마 내 인생은 달라졌을 거야.”
물은 7m만 흘러가면 스스로 자정의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물의 힘이고 오염되지 않는 이유가 됩니다.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개혁하고자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심부름꾼, 교회의 심부름꾼으로 나서야 합니다.
결론
바닷물의 염도는 2.8%입니다. 염도가 있어 바다가 썩지 않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늘빛교회의 염도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들로 인해 교회가 더 정화되기를 기대합니다. 늘빛교회의 심부름꾼으로 기다리며 준비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들로 인해 교회가 더욱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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