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성찬예식] 대접받음과 취급당함(이사야 53:5)

갈렙처럼 2025. 2. 2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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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음과 취급당함

이사야 53:5

 

서론

우리는 주님께서 제정해 놓으신 성찬예식을 하고 있습니다. 성찬예식은 자신들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방법은 주님의 렌즈로 우리 상황을 보고, 주님의 생애로 우리 생애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1. 주님은 ‘대접받음’이 아니라 ‘취급당함’을 당하셨습니다.

대접(待接)은 존경과 예의가 들어있고 취급(取扱)은 멸시와 거절이 들어있습니다.

 

저는 어제 병원 대기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교회에서는 대접을 받습니다. 거기 병원에서는 환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초조하고 힘없는 환자들-무슨 병명이 나올까, 수술 하게되면 치료비는 어떻게? 저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목사로서의 대접은 없고, 환자로서의 취급을 당합니다. 그나마 저는 두 분(장 ․곽 집사님)이 계시고 이사장님도 지나가는 길에 어떻게 왔느냐고 아는 체 해 주어 어느 정도 대접을 받았습니다.

 

2년 전에 디스크 수술을 할 때는 정말 모욕적이었습니다. 완전히 발가벗고 돌아서라, 일어서라. 앉아라… 그것도 젊은 아가씨 엑스레이 기사가 커튼 친 안쪽에서 그러는데 정말 모욕적인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들 어떻게 합니까? 환자인데.

병원에서 수술할 때 의사들이 왜 온 얼굴을 마스크로 감추고 수건을 덮어쓸까요? 수술을 실패해도 환자가 자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만큼 병원에서는 인격체로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환자로서 ‘취급’을 당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거절당하고 짐승 곁에서 태어난 예수님, 폭군에게 쫓겨 먼 나라로 피난했던 예수님, 여우도 굴이 있지만 깃들일 곳이 없다던 예수님, 막 노동자로 우습게 여김을 받던 젊은 시절, 기적이나 체험하고 빵이나 얻으려는 군중들, 독립운동에 이용하려 드는 정치가들, 계획대로 안 된다고 토사구팽 하는 유대인들… 주님은 결국 십자가 위에까지 올라가셨습니다. 그 분은 죄인으로 취급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병 환자들과 함께 대기하시고 취급받으시는 모습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마저 아들을 성자(聖子)로, 독생자로 대접하지 않고 죄인으로 취급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짖습니다. 사랑하는 그 분마저 아들로서의 대접을 놓으시고 죄인으로 취급하시다니… 마지막 버틸 수 있는 힘을 잃은 것입니다.

 

젊은이가 모함에 걸려 범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모두들 나쁜 놈이라며 욕하고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젊은이는 당당하게 견디어 냈습니다. 스승이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뭐라도 던지지 않으면 같은 취급을 당합니다. 스승은 돌도 욕설도 할 수 없습니다. 스승은 대신 꽃을 던졌습니다. 젊은이는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스승은 꽃을 던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스승만큼은 자기를 믿어준다고 생각했던 젊은이에게 스승도 자신을 범인 취급한다는 사실 앞에 그냥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그분은 자원해서 대접받는 길을 버리시고 취급당하시는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대접’ 받으시던 그분이 ‘취급’당하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대접을 받으셔야 할 분이 취급을 당하셨는가? 그걸 묵상해야 합니다.

2. 주님의 십자가는 ‘대접받음’과 ‘취급당함’의 교환 장소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는 우리의 허물을 위해 찔리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 분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교환(交換)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취급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는 대접으로 교환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 놓여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의인과 영생의 삶으로 교환되었습니다. 그 분이 죄인이 되시고 우리는 의인으로 교환된 것입니다. 아! 십자가는 교환의 장소입니다.

 

그래요! 기독교는 교환의 종교입니다. 징계를 받을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는 삶으로 교환되는 곳입니다. 채찍에 맞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어루만져줌으로 대접해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죄인의 몸으로 들어왔다가 의인의 신분으로 교환됩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로 인생이 교환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처음 엘리베이터가 들어왔을 때 할아버지가 백화점에 갔습니다. 분명 할머니가 들어갔다 잠시 후 나오는데 아가씨가 내립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빨리 가서 할머니 모시고 와!” 그래도 이 할아버지는 의리가 있는 남편입니다. 혼자만 들어갔다 나와서 젊은 아가씨들과 어울리려는 생각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요! 십자가는 교환의 장소입니다. 취급만 받던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 곳으로 교환되는 곳입니다. 눈물이 기쁨으로 교환되고 베옷이 드레스로 교환되는 곳입니다.

3. 주님 안에서 ‘취급당함’을 ‘대접받음’으로 승화시키십시오.

우리가 취급당할 때 분노하지 말고 주님의 취급당하심을 기억하세요. 오늘은 주님의 취급당하심을 기억하며 주님의 길과 내 길,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 주님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면서 다듬고 깎고 주님과 함께 같은 길로 새롭게 디자인하는 성례식의 주일입니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짐승 곁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우리 외로움과 쓸쓸한 시간을 알고 계십니다. 폭군에게 쫓겨 먼 나라로 피난했던 아기 예수님은 나그네와 같은 우리의 적막함을 알고 계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지만 깃들일 곳이 없다던 예수님은 의지할 곳 없는 우리의 불안을 알고 계십니다. 목수의 집에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난 예수님은 우리의 땀과 고생과 그 피로를 알고 계십니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시험을 당하신 예수님은 욕심의 수렁 앞에 선 우리의 위험을 알고 계십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하고 외치던 예수님은 우리의 답답함과 절망을 알고 계십니다. 친구들의 떠남과 배신을 체험하신 예수님은 혼자서도 굳세게 살아보려는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하고 호소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과 실패의 발걸음을 알고 계십니다. 수건을 동이고 제자의 발을 씻던 예수님은 숨은 봉사와 우리가 지불한 희생을 알고 계십니다. 갈보리 언덕을 홀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남몰래 흘리는 우리의 눈물을 알고 계십니다.》(다음 카페에서)

 

결론

오늘 성례식은 단순히 추모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교환의 날입니다. 죄를 드리고 용서로 교환하세요! 상처 입은 마음과 찢어진 가정들을 드리시고 치료받는 마음으로, 회복되는 가정으로 교환될 수 있는 날이 되세요! 교회 안에서 상처 입었던 교인들이 다시 교회로부터 오는 즐거움으로 교환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고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취급이 아니라 대접해 주시는 주님과 함께 새생명으로 다시 일어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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