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삼일절] 그리스도인의 자유(갈라디아서 5:1)

갈렙처럼 2025. 2. 2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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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절

 

서론

뉴욕 부룩클린 플리마우스 예배당. 1928년 주일 예배가 끝나자 흑인 노파가 간증을 요청했습니다.

 

“지금부터 68년 전인 1860년 9월19일 주일, 노예 소녀가 이 광장에서 경매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먼저 팔려 가는 아버지를 두렵고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당 안에서 목사님께서 8백 달러를 갖고 나오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교회가 헌금한 돈입니다. 여러분들은 68년 전인 그날 교회당 안팎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모를 것입니다. 노예 소녀를 구원하기 위하여 헌금을 드리고 사랑의 기도를 드리던 교회는 천국이었고 같은 시간에 저 바깥에서 오직 돈을 벌기 위하여 인간을 매매하고 채찍질하고 고함지르던 그곳은 바로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부모들의 헌금한 돈으로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던 그 소녀 노예는 바로 여기에 서 있는 저입니다.”

 

그리고서 흑인 할머니는 “저를 자유롭게 해주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하고서는 단 아래를 내려갔습니다. 그 날의 예배는 감격적인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에게 자유는 단순히 민주주의라는 이름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유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느냐? 짐승처럼 강요된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남북 전쟁시 미국 흑인 노예들이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전쟁터에서 죽어갔을까요?

 

어떤 사람이 군대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잠들만 하면 기상, 먹을만하면 식사 끝, 외박 할 만 하면 외박 금지, 놀만하면 휴식 끝, 볼만하면 동작 그만, 정들만 하면 전출, 휴가 갈 만 하면 비상, 편지 볼 만 하면 소등, 놀려고 하면 개인활동금지, 군대생활이 편할 만 하니까 제대”

 

군대에 가면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는 아주 편한 곳 같은데도 사람들이 매우 불편한 곳으로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곳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되게 하는 요소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46년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의 해방, 정치적인 해방과 자유는 누리고 있지만 진정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며 자유의 품에 안겨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까? 일본의 압제 하에서는 자유 하지만 아직도 정신대 문제, 신사참배문제, 역사왜곡문제, 일본문화의 잔재는 우리로 하여금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지금도 불편함과 멍에 속에서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조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참 자유를 누려야 합니까?

1. 죄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죄”라는 단어는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인류에게 혐오성, 파괴성, 전염성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혐오감을 주고 개인의 인격과 정서가 파괴됩니다. 죄는 수치감을 주고 죄책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죄는 인간에게 멍에가 되고 결국은 정서적으로 그 사람을 파괴해 버리고 맙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죄는 두려움을 주고 삶에 기쁨을 가져가 버립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려면 죄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은 죄의 문제 해결을 율법에서 찾았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많은 의식들을 지키고 계명을 지켜야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율법해석을 잘못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율법은 613가지입니다. 하라는 법이 248개, 하지 말라는 법이 365개입니다. 율법은 거미줄 같이 쳐져 움직이면 그 법에 저촉될 것 같습니다. 늘 죄의식이 있었고 죄의식은 죄책감으로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자신의 행위 여하에 따라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는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로 해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단번에 모든 사람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갈라디아 지방의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죄책감과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심령에 자유와 평안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지방을 떠나자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갔고 자기 행위에 근거한 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3장 1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눈앞에 보이거늘”-“현수막에 써있는 것처럼 보이거늘”이라는 뜻입니다. 너무도 확실한 사실을 부인하고 다시 율법을 통해서 죄사함을 누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장 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십자가에서 얻어지는 죄사함의 참 은총을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하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이 임종시에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루지 못한 업적 때문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두려워합니다. 어릴 때, 청소년 시절의 죄책감으로 평생을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알며 두려움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엄청 엄격한 분이었습니다.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에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교회 여 집사 가정이 정신 착란증에 빠졌습니다. 며느리, 남편, 마지막에는 시아버지가 뒤를 이었습니다. 교회 목사님은 이 가정을 위해서 6개월 동안 눈물의 기도를 흘렸는데 세미나 갔다 와보니 치유되었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된 줄 알고 뛸 듯이 기뻤는데 알고 보니 무당 불러다가 굿하고 나서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가정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시모가 노인성 치매-지친 가족들이 환자 간병에 소홀해졌습니다. 시모가 죽고 나니까 한 사람씩 실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책감.

 

무당이 와서 며느리에게 “너 이년, 나한테 너무했어. 이 죽일 년!” 다구치자 며느리가 용서를 구합니다.

“이제 북망산으로 떠나야 할텐데 노자 한 푼 없구나”

아들에게 “네 계집 말만 듣고 나를 그렇게 괄시해? 이 죽일 놈!” “아이고 엄니, 잘못했어요!” 남편에게도 같은 반복.

그러고 나니 실성에서 깨어났습니다. 돈을 드렸다는 것으로 죄책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리적 착각에 불과합니다.

 

죄책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치료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희생하신 그분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수용하면 지난 세월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다음의 죄는 기억 속의 죄이고 우리를 죄의 종으로 끌어가지 못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깨달음이 있어야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이런 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2. 소유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모든 물질과 소유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죄에 오염된 인간은 물질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소유를 통한 자유는 끝이 없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고 불만족스럽습니다.

 

미국의 갑부 록펠러에게 타임지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현재 가지고 있는 부유함에 만족하십니까?”

“아니오!”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야 만족하겠습니까?”

“조금만 더!”

 

이런 록펠러였지만 그는 돈에서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그는 시카고대학을 비롯해서 12개의 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지어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돈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돈은 우리의 주인이 되고 그들은 돈의 종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유는 내가 무엇을 소유했느냐에 있지 않고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가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에 대해 분명한 자의식이 있게 된다면 우리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타인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때로는 남의 이목을 지나치게 생각한다는 것처럼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물론 남의 이목은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는 것, 아침마다 옷 장문을 열면서 어떤 옷을 입을까? 망설이는 것, 필요합니다.

목사가 허구한 날 교회에 나오고 싶어서 나옵니까? 새벽기도회에? 책임감 때문에! 남의 이목 때문에 나옵니다. 이런 이목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필요하게 남의 이목을 생각한다는 것, 남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처럼 멍에가 없습니다. 남에 대한 의식은 하고 살아야 하지만 이웃의 평가에 대해서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갖지 못한 이들을 보면 왜곡된 자아상을 갖고 있습니다. 왜곡된 자아상은 타인에 의해 새겨진 것들이 많습니다.

부친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왜곡된 자아상을 갖고 있습니다. 조금만 남의 일에도 지나치게 예민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두려워합니다.

 

목회도 그렇습니다. 너무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설교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남들이 나를 똑똑하게 보아주기를 원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남들이 나를 아름답게 보아주기를 기대합니다. 다 부질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 자신을 살아야 자유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평가자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는 진리를 아는 자이고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결론

오래 전애 우리 집에 토끼가 있었습니다. 안전하고 너무 잘 먹습니다. 그러나 자유가 없습니다. 불쌍하게 보입니다. 풀어놓아도 갈 곳이 없습니다. 그곳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자유에서 자유함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앞세우십시오!

죄에서 자유를 누리십시오!

소유에서 자유를 누리십시오!

이웃에게서 자유를 누리십시오!

그리스도의 영은 자유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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