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架上七言 4言.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시다(마가복음 16:33~36)

갈렙처럼 2025. 3. 2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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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架上七言 4 ] "고뇌의 말씀"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시다

마가복음 16:33~36

 

서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지 세 시간이 지났을 때입니다. 제 6시쯤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제 6시라면 우리 시간으로 정오 12시입니다. 팔레스틴에서 12시면 햇빛이 가장 강렬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너무 눈이 부셔 눈조차 바로 뜰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사방은 칠흑같이 캄캄했습니다. 어둠은 세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 어두움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아래 있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지?" 하며 공포에 떨었지만 예수님은 영적으로 대단히 민감하신 분이십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아주 민감하십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사람들을 향하여, 한쪽 강도를 향하여, 마리아를 향하여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면서도 그분의 영적인 안테나는 위에 계신 하나님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실까?'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에 어두움이 짙어졌을 때 주님은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돌리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외면.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남기신 네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네 번째 말씀은 고뇌의 말씀입니다.

1. 예수님은 잘 참으며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처럼 참을성이 많은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인내하며 살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육신을 입으시고 참아내셨습니다. 30년을 참으셨고, 바리새인이나 대적자들의 음해에도 잘 참아내셨습니다.

 

제자들의 비열한 행동에도 빌라도 관저에서의 부당한 재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 위에서도 의연하게 참아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나를 버리시냐?" 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철학자 버드란트 러셀은 이런 예수님을 향해 너무 약한 모습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만한 것도 못 참으셨나?"고.

 

한국전쟁 당시 한 장교가 군인들을 이끌고 마을에서 마을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쓰러뜨렸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산 속으로 피신했습니다. 절의 승려만이 피신하지 않았다.

 

장교가 절 안으로 들어가 칼을 빼들고 말했습니다.

"넌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널 벨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자 선승은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소? 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당신한테 베일 수 있는 사람이오."

이 말을 듣고 장교는 놀라서 크게 절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절규는 어른스럽지 못합니다. 그만한 고통을 참지 못하여 부르짖다니… 그러나 예수님의 절규는 육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부르짖은 게 아닙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주는 고독함을 참지 못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이것을 가장 두려워한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바로 이런 두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 수 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이 잔은, 육신의 고통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그분은 달아남으로 그 잔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두려웠던 것은 하나님의 외면입니다. 하나님의 외면 없이 죽어가고 싶었고 사역을 마무리짓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 나를 외면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런 순간은 피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보다 하나님의 외면을 더 두려워 하셨던, 오직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인정 속에서만 살아가고자 했던 분이셨습니다.

 

주님의 이런 모습은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십니다.

우리가 가장 고통을 받아야 할 때는 육신의 고통, 마음의 고통, 그래서 오는 좌절입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일들은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을 때, 내 마음속으로 그분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지 못할 때,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외면을 가장 무서워해야 할 것입니다.

2. 죄는 하나님의 고개를 돌리게 합니다.

세상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은 지난 33년 동안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해 왔습니다.

*독생자 예수,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으로 내려가신 예수

*세상의 구원자 예수

 

독생자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예수 안에서 세상을 보았고 예수 안에서 세상을 대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용서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여러 시대의 세상을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독생자의 영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독생자에게서 눈을 돌리십니다. 독생자의 마음에서 눈을 돌린 게 아니라 독생자의 온몸에 끼얹어있는 그 죄악을 보시며 하나님은 혐오감 때문에 외면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인류의 모든 죄가 총 집합되어 있습니다.

*지난 날 간과하셨던 구약 성도들의 죄악,

*십자가 아래에서 여전히 죄를 짖고 있는 사람들의 죄악,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사람들의 죄악들이 한꺼번에 총 집합했습니다.

 

그 죄의 양은 얼마나 많았겠으며 추잡했겠습니까? 죄라는 죄는 다 모였습니다.

*살인죄-어린것들 죽이고 부모를 살해하고 형제들을 죽이고

*도둑죄-남의 것을 훔치고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컨닝한 죄

*간음죄, 이간 죄, 눈흘기는 죄, 마음으로 욕심을 낸 죄....

 

죄는 수없이 많습니다. 한 사람의 죄도 많거늘 모든 인류의 죄들이 거기 쌓였으니 얼마나 많은 죄악들이었겠습니까?

우리의 죄도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마치 난지도에 쓰레기들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방불했습니다. 난지도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그 쓰레기에서 살아가기나 합니다.

 

하나님은 그 죄의 산더미를 보며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말씀을 하시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스런 눈으로 주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한 강도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한은 평생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이제 세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를 심판해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의 역사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죄악들을 모두 예수님께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게 세 시간 정도 걸렸다 생각합시다.

죄가 다 모였을 때, 그 죄가 예수님에게 다 뒤집어 씌어졌을 때 아들의 모습은 죄 때문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죄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을 돌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거리에 시신이 있는 것처럼 끔직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형편을 알았습니다. 하나님마저 철저히 외면해 버린 순간입니다.

십자가는 공중에 사람을 들리게 합니다. 땅에서도 들리고 하늘에서 마저 들린 그 십자가. 하나님의 외면 속에서 예수님은 외치신 것입니다. 가장 고독한 순간입니다.

 

"나의 하나님…."

그러나 예수님의 절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바로 이 것을 말함입니다.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강렬하게,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나무 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찾아다니다 가시에 심장에 찔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순간 그 울음소리는 천상의 신마저 감동시킨다는 전설 속의 새입니다.

 

우리 주님의 울부짖음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돌아서서 울고 계시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이 순간, 정작 소리쳐야 하는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셨다고 말입니다. 아들이 십자가 달려있는 모습, 죄인이 되어있는 모습, 이제는 눈을 돌리며 펑펑 울음을 흘리신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아이가 화상(火傷)을 입었습니다. 병원에서 아이들이 겉가죽을 벗겨낼 때 젊은 어머니가 아이의 이름을 불러가며 펑펑 울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 보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상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쉬운 게 아닙니다. 더군다나 남을 사랑하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원수처럼 대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용서해 준다 해놓고 돌아가서 너무 억울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나님 사랑, 예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할 때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절규로 우리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절규는 우리들을 대신한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 나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는 그 고통의 절규.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절규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 가운데서 부르짖어야 하며 삶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 하필이면 왜 나에게?"를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부르짖어 주셨기에 어려운 시련을 잘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부르짖어야 합니다. 더 고통스러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잘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강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들을 위하여 부르짖었기에 그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견디는 힘을 얻었고 하나님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절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당합니까? 그럼에도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남을 입었도다"(사53:5)

 

찰리 보스웰이라는 미국 사람은 2차 세계대전 중 불길에 휩싸인 탱크에서 친구를 구출하다 실명(失明)을 하게됩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 그는 육상선수였습니다. 앞을 보지 못했을 때 얼마나 부르짖었을까요? 여러 날을 "하나님, 왜 나를…"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안정이 왔습니다. 그는 운동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시작한 운동은 골프였습니다.

그는 정열을 갖고 몰두했으며 맹인골프에서 연속 13승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골프스타는 벤 호간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습니다. 벤 호간 골프대회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찰리는 벤 호간 골프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시상식 자리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찰리는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느냐고 제의했다. 호간은 좋다고 했습니다.

"당신과 골프경기를 갖고 싶다"

호간은 장난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때 찰리가 무심결에 말했습니다.

"우리 돈을 걸고 경기를 해볼까요?"

"그건 공정치 않아요."

"아, 걱정 말아요. 한 홀마다 1천 달라 씩 내기를 합시다, 호간씨"

 

신사다운 골퍼는 말했습니다.

"전 할 수 없어요. 내가 이겨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눈이 안 보이는 당신의 불리한 조건을 내가 이용했다고 수군거리지 않겠습니까?"

"겁쟁이이군요."

 

호간은 할 수 없이 동의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봐주지 않을 겁니다. 돈이 걸려있으니까요"

"물론이지요. 저 역시 당신이 봐주기 게임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좋소, 보스웰씨. 시간과 장소는 당신이 정하시오"

그러자 찰리 보스웰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열두 시 정각에 합시다. 바로 오늘밤 말이오"

 

이런 당당함은 바로 예수님의 절규로부터 나온 위대한 인간승리입니다. 그는 더 부르짖고 괴로워해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이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절규는 주님께로 인도되었고 이처럼 당당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뇌를 안고 죽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지옥 불구덩이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그 죄를 처리해 주심으로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 천국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끝까지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결론

중세시대에 불행을 당했던 한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제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지를 일러주지 마시고 다만 저에게 당신을 위하여 제가 고통을 받고 있음을 확신케 하소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생소한 것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죽어갔습니다. 그러기에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값진 것입니다. 이 값진 구원을 우리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활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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