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십자가
마태복음 27장 35~38절
서론
인간 역사에 예수님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분은 없습니다. 세상에 들어오실 때와 세상에서 나가실 때 영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의 몸을 빌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죄와는 무관한, 순결 그 자체였습니다. 탄생하실 때 천사들은 노래하고 동방박사들은 예물을 드렸습니다. 세상에서 나가시는 본문의 현장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이라면 어떻게 그 아기가 이런 모습으로 강도가 되어버렸을까?
너무도 놀랄 것입니다. 두 명의 강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동정녀 마리아 대신 이제는 예수 외에도 여섯 명의 자녀들을 더 낳은 마리아, 고왔던 얼굴, 순결함의 상징이었던 여인은 세파에 시달리고 피곤한 시골 중년 여인이 되었습니다. 천사들 대신에 죽여라! 는 악에 받친 고함들이 나오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조롱하며 비웃고 있습니다. 만약 30여 년 전의 동방박사들이 다시 이 모양을 보았다면 경악했을 것입니다.
성화(聖畵)를 그리는 화가가 예수님의 얼굴 모델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소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소년을 모델로 예수를 그렸는데 유다의 그림이 영 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그림이 중단되었다 다시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유다의 얼굴은 죄수 중에서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감옥에 갔는데 정말 한눈에 유다라고 생각될만한 사람을 찾아내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스케치하는데 그가 웃으며 말해요.
아마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겠지요.
“거 참 내 인생도 코미디군요.”
“왜 그러슈?”
“오래 전에는 예수의 모델이 되더니 지금은 내가 유다의 모델이 되니 말이오!‘
그래요, 예수님께서도 세상으로 들어오실 때는 가장 깨끗한 몸으로 오셨지만 세상에서 나가실 때는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탄생하실 때는 평화의 아기 몸으로 구유에 누이셨는데 죽으실 때에는 끔찍한 형틀에 죄수의 몸으로 달려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세상으로 들어오실 때에는 동정녀의 몸을 빌어서 오셨기에 죄가 없었어요. 그러나 33년 후 세상에서 나가실 때는 인류의 죄-아담에서부터 세상이 끝날 때까지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사람의 죄를 홈빡 뒤집어쓰고 가셨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다른 게 아니에요.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 죄 없는 깨끗한 몸으로 오셨는가를 믿는가, 나가실 때는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가신 더러운 몸이 되셨는가?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내가 착하게 살아 구원받고 악하게 살아 구원받지 못한다, 그런 식의 구원관은 일반 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관이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1. 하나의 십자가-자신에게 매여있는 인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나가실 때 두 강도와 달리셨습니다. 어느 쪽 강도인지는 모르겠어요. 편의상 왼쪽 강도라 합시다. 왼쪽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했고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지만 사실은 자기에게 박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불신의 죄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죄는 원죄입니다. 원죄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 스스로 구원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종교들은 자비를 말하고 선을 베풀지만 사실은 스스로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스스로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고 신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쪽 강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합니다. 결국 죄 때문에 지옥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거절” 때문에 간 것입니다.
강도는 주님을 거절하고 끝까지 자신의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어디에 못박혔나요? 자기의 행위에, 자기의 죄악에, 자기의 의로움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어떤 사람의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선하다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기에 구원을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왼쪽 강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 하나의 십자가-예수님에게 주소지를 옮긴 모습을 보여줍니다.
(편의상) 오른쪽 강도도 죄인입니다. 십자가에 달릴 정도이니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성경에는 “행악자“(누가복음 23:32)로 나와있습니다. 그 역시 다른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다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 그 간절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모르고 있습니다!”
강도는 지금까지 그런 기도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평소에는 좋은 말씀 전하다가도 극한 상황에 처하면 평소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위인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자기 밑에 와 용서를 빌어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는데 예수는 지금도 계속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일방적인 용서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스처가 아니라 진실이었습니다.
가슴이 콱! 메여왔습니다. 그 기도 속에는 자신의 조롱도 들어있고 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 성령께서 그의 입을 여셨습니다. 그는 동료를 욕하고 예수에게 내세를 부탁했습니다. 예수를 영접했고 예수의 나라를 희망했습니다. 그는 주님께로부터 확실한 구원의 보장, 천국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의 의로움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주소지를 제대로 옮겼습니다. 예수라는 주소지로 옮겼습니다. 비록 그의 인생의 주소지에는 죄 투성이지만 그 죄는 예수의 십자가에 박아버리고 자신의 남은 생애와 내세의 삶은 주님의 십자가로 옮겼습니다. 주님께서 의로움으로 부활하실 때 그 역시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영접 이후 아무런 선한 행위를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그의 인생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런 극적인 구원을 보이신 것은 구원의 “요행”을 보이려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은혜를 통해서 받게되는 믿음의 구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아들을 행악자들과 동류로 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십자가로 주소지를 옮겨야 합니다.
3. 하나의 십자가-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십자가입니다. 형통할 때, 즉시로 기도 응답되면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사가 흐트러지고 기도 응답은 오지 않고 갈수록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그런 십자가 꼭대기 위에 딸려있기 마련입니다.
감옥의 죽음 앞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는 구출을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구출 받았고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했던 사람들의 기도도 응답 받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대에 투옥 당했던 야고보는 죽임 당했고 그를 위해서 기도했던 사람들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야고보와 그를 위하여 기도했던 사람들-기도가 거절당했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운데 있던 십자가입니다.
세 번 째의 십자가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십자가입니다. 욥과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일부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더 엄청난 사건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지금 어느 십자가에 있을까?”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 우리는 그 중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는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에 달려있으면서 육신적으로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십자가에 달려있는 행색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는 주님에게 주소지를 옮겼으면서도 육신적으로는 아직도 내 본성의 주소지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오른쪽 강도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구원받은 강도는 이런 면에서 아쉽습니다. 어떻게 살까? 그런 고민 없이 간 것은 그의 비극일 것입니다.
결론
지나치게 미국 일변도의 영화라고 비판받기도 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부정적인 요소임에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라이언의 세 형들은 모두 2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합니다. 막내만이라도 어미 품에 돌아오게 해달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편지를 받은 군(軍) 당국은 밀러 대위가 이끄는 여덟 명의 병사들에게 라이언 일병을 구해오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라이언을 구하러 떠난 병사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불평하고 명령을 내린 장군을 욕하며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전투를 치릅니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비현실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전사합니다.
자신을 구하러 온 병사들과 함께 돌아가기를 거부한 라이언 일병은 영화가 끝나갈 무렵,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누워있는 밀러 대위 역인 톰 행크스에게 다가갑니다. 오직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와 부하들을 희생시켰던 밀러 대위는 그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합니다.
“이 모습들을 감사히 받아라! 자네는 우리보다 더 훌륭히 살아야 한다”
유언 같은 그 말은 “이들의 희생을 받아라 오로지 너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너는 살아났다. 그들은 더 이상 조국에 바칠 것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는 있다. 너는 그들의 희생에 걸 맞는 인생을 살아가라.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그들의 행한 일을 감사히 받아라” 는 뜻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영화는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지나고 이제는 노인이 된 라이언 할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죽어간 밀러 대위의 묘역에 서서 눈물지으며 중얼거립니다.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자신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나 훌륭하게 살았을까?”
“……?”
“나 훌륭한 사람인가?”
아내가 대답합니다.
“그럼요!”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문득 누군가가 생각났습니다. 가운데 십자가에 있어야 할 사람 말입니다. 누구일까요? 가운데 십자가는 원래 예수님의 몫이 아닙니다. 바라바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박히시고 바라바는 살아난 것입니다. 지금 바라바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예수님도 바라바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씀 하실까요?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죽는다! 이 모습들을 감사히 받아라! 너는 더 훌륭히 살아야 한다”
그 말씀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서른 세 살에 죽은 나 대신 더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이번 한 주간 동안 묵상할 수 있는 문구로 드립니다.
“나의 죽음을 미안해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라! 나보다 더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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