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架上七言 6言: 십자가 위에서, 완성을 선언하시다(요한복음 19:30)

갈렙처럼 2025. 4. 6. 16:25
반응형

사진=픽사베이

[ 架上七言 6 ] 완성의 말씀

십자가 위에서, 완성을 선언하시다!

요한복음 19장 30절

 

서론

영국 여왕이자 사회의 우상이요 유럽 패선계의 지도자인 엘리사벳은 임종시 그의 침대 곁에 앉아있는 시녀에게 얼굴을 돌려 말하기를 "오, 나의 하나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이제 나는 그 끝장에 이르렀습니다. 끝장, 끝장,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인생, 이제 그것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생을 누리고 승리하고 사랑하였으나 이제는 그 끝이 이른 것을 압니다!" 울부짖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습니다.이것이 바로 세계의 절반이 부러워했던, 영국 여왕의 마지막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여왕으로 태어나 모든 것을 다 누렸던 여인이었으나 죽을 때는 두려움과 탄식을 남기고 갔습니다. 살았을 때는 모든 것을 다 이루며 사는 것 같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기에 "다 이루었다!" 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대조적인 삶을 살다간 예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여왕처럼 호화로운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실패한 사람의 최후였습니다. 그러나 임종 직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놀랍게도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남긴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만족의 말씀이요, 승리의 선언이십니다.

1. 말씀을 좇아 살았다는 만족의 선언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은 인간적으로는 초라합니다. 아무 것도 남겨진 게 없습니다. 자식이 있는가? 제자들의 양육이 성공했는가? 명예를 얻었는가? 업적을 남겼는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33년 동안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비참한 모습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초라한 나사렛 청년을 멸시하고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의연하셨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어도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왔습니다. 그를 향하여 예언되어진 선지자의 예언을 좇아 살아왔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도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언에 대한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예언된 것을 하나 하나 검토하시더니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만족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의 승리는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의 궤도를 걸어오셨기에 인간적으로는 초라한 최후를 맞으면서도 그분은 승리의 외침, 만족의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성공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귀영화가 부질없는 것임을 우리 역사는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족한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그 궤도를 좇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여한이 없이 만족한 마음으로 가면 그 사람이 성공한 사람인 줄 믿습니다.

 

큰 땅 부자가 있었습니다. 쇼핑센터를 짓고 수십 개의 점포를 갖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갔더니 국수가 너무 비싸다고 그냥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무엇을 이루었는가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인디언 선교에 생애를 바친 미국 식민지 시대의 평범한 선교사입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영토를 뺏기고 보호구역에서 살아가는 인디언들에게 주님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거룩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2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맙니다.

 

그는 결핵을 비롯한 병치레로 선교다운 선교를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29세의 나이로 "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일기를 남겼습니다. 그 일기는,

 

*1740년 미국을 휩쓴 대각성운동의 주도자 요나단 에드워드의 심장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감리교운동의 창시자 존 웨슬레의 마음에 큰 전환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인도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케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선교사역에 헌신케 했습니다.

 

사막을 횡단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우물을 남기고 한 사람은 자기 기념비를 남겼습니다. 수년 후 다시 가보았더니 기념비는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목마르다!" 하신 주님, 이제 다 이루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사람의 일생에 무엇을 남길 것이며 이룰 것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마지막에 누구의 앞에 서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죽음 앞에 설 때에는 아무 것도 우리의 의지가 될 수 없고 방패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그 분과 궤도를 같이하며 살아왔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만족의 소리, "다 이루었다!" 하며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2. 구속의 온전한 값을 다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말 `테레오'는 신약성경에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구절에서 다양하게 번역된 의미들 몇을 살펴보면 우리가 구주께서 사용하신 그 말의 온전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시고

마태복음 11: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리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마치시고" 무엇을 다 마치셨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와 죄책을 우리에게서 옮기시는 일을 다 마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수고요 고생이었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살면서 죄짓고 고생하고 결국에는 사망으로 떠나갑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게 마련이며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를 다 당신 자신에게로 옮기십니다. 이제 죽음으로 그 죄도 함께 무덤 속에 장사지냅니다. 그 일을 마치신 것입니다.

 

내었다

마 17:24 "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내지 아니하느냐" - "내었다" 무엇을 내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서 죄책을 인수받아 죄인이 된 인류는 스스로는 죄 값을 지불할 길이 없고 누군가 죄의 값을 지불해 주어야 하는 데 모두들 빚진 몸인지라 지불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죄 없으신 몸, 그 죗값을 지불할 수 있는 데 그분도 살아생전에는 그 값을 지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생하며 죽어 가는 이들을 볼 때 민망해 하시며 애통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 진노의 잔을 쏟으실 때에, 그것이 세 시간이나 계속되고 이제 목숨까지도 끊어지실 때에 죗값을 다 지불하고 계심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인류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필하고

눅 2: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시고"

 

"필하시고" 무엇을 필하셨습니까? 율법의 최고 요구를 필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최고 요구는 공의입니다. 죄지은 자들에게의 공의는 "죽음", "사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으심은 약자의 죽으심, 억울한 죽으심이 아니라 율법의 공의를 이루시기 위한 승리의 죽으심입니다.

 

응하리라

눅 18: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응하리라" 무엇을 다 응하셨습니까?

그에 관한 성경의 모든 예언들이 다 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의미들을 한데 모으면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 중 여섯 번째 말씀이 지닌 의미의 범위를 알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 "다 마쳤다" "다 냈다" "다 필하였다" "다 응하였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구속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이루심'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다 이루셨다!"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하나님은 즉각 동의 하셨습니다.

 

* 성소의 휘장이 위에 찢어져 내렸다.

* 부활하심으로 희생제사 열납하셨다.

* 자기 우편에 앉히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이 얼마나 값진 것임을 나타내 보이신다.

*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그의 백성들에게 적용시켰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졌고 하나님은 이에 동의하셨습니다. 죄인들이 여기에 덧붙일 일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구원의 값으로서 우리의 행위는 아무 것도 요구되지 아니합니다. 죄인들이 해야 할 일이란 다만 이제부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다 이루었다" 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일대 일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재자로 내세워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인이 되고 예수님 안에서 의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다 이루셨습니다. 구원을 이루시고 죄값을 다 지불하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분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덧붙이려하는 것이 바로 불신이요 죄입니다.

 

그리스도인 농부가 목수에게 전도하려고 했습니다. 농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다고 했지만 목수는 나름대로 자기도 먼가를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농부는 목수에게 문 한 짝을 짜 달라고 부탁. 목수가 정성스레 튼튼한 문을 만들어 주자 농부는 밭에 쳐 둔 울타리에 그 문을 달 테니 한번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목수가 정한 시간에 밭에 가보니 농부가 도끼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아니 자네 지금 무엇을 하는가?"

"도끼로 손 좀 보려고 하네"

"그럴 필요 없어. 그 문은 손질이 다 끝난 것일세. 달면 되네"

 

그러나 농부는 도끼로 문을 찍어내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이 문은 완벽하다네."

농부는 도끼질을 멈추며 목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도 마찬가지일세. 그리스도께서 큰 희생을 치르시고 이루어 놓으신 용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네."

그제야 목수는 그 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결론

며칠 전, 노회 수양회에 가다가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해장국과 순대국을 먹고 계산하러 갔더니 계산이 이미 다 끝나있었습니다. 우리 장로님이 다 계산 끝난 것입니다. 음식점 주인의 그 수고, 재료값, 이미 다 지불이 끝난 것입니다.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아십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좋을 걸 먹을걸'

다 이루었다는 말은 "우리 장로님께서 계산을 다 끝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음식점 주인은 우리에게 계산을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계산을 이미 다 끝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계산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 장로님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나만 바보 되네'

장로님은 우리를 위해 2만원 정도의 값을 지불했습니다. 만약 그것도 지불이 안 되었다면 우리는 망신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 2만원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러기에 "늘 울어도 눈물로서…" 이런 찬송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만을 자랑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