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고난주간:주님께서 지신 세 십자가(누가복음 23:32, 33)

갈렙처럼 2025. 4. 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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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픽사베이

주님께서 지신 세 십자가

누가복음 23:32, 33

 

서론

오늘은 십자가의 의미를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본문에 세 개의 십자가가 나옵니다. 중앙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좌우에는 강도들이 달린 십자가, 모두 세 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지만 사실 예수님은 이때만 아니라 33년 생애 평생을 십자가와 함께 한 세월이요 십자가에 달려 살아온 생애입니다.

제1의 십자가, 육체에 달린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에서 비로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실 때 그것은 곧 십자가에 박힌 생애가 되었습니다.

 

-영이신 분이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영은 어느 곳에나 존재합니다. 육신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신분이 됩니다. 창조주는 무엇이나 할 수 있지만 피조물은 육신 속에 갇혀있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죄에 오염된 세상에서 삽니다. 강도들과 함께 달린 그 자체가 얼마나 모욕적이며 낯 뜨거운 상황입니까?

 

-그는 유대인의 혈통으로 출생하셨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압제 하에 있습니다. 자유도 없고 권리도 없는 그런 식민지 출신입니다.

 

-그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양이 볼품없습니다. 모양이라는 말속 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외모, 집안, 학벌, 소위 스펙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빛나는 성공자 위너가 아니라 루저(loser)입니다. 루저는 (경쟁에서) 패자, (특히 경멸적인 어조를 담아서 가리켜) 실패자입니다. 외모에서 루저요 학벌에서 루저요 스펙에서 루저입니다. 한 마디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창조주이시고 영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하찮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 자체가 굴욕이요 숨 막히도록 답답한 일이요 살아오는 내내 힘겨운 생애입니다.

 

독일 작가 프란츠 가프카의 중편소설 <변신>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끔찍한 해충으로 변하고 그로 인한 가족들과 겪는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뱀이거나 돼지, 벌레로 변신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가 거대한 구렁이가 되어 있거나 평소에 징그럽게 생각하는 벌레로 변신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말을 하는데 음성도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생각조차 짐승으로 변하면 차라리 좋은데 머리는 완벽하게 사람의 지능입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자살도 마다하지 않겠지요. 그런 육체를 입고 어떻게 살아갑니까? 지옥이 따로 없고 십자가가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 사셨습니다. 33년을 그리 사셨습니다. 그의 성육신 자체가 십자가였습니다. 그걸 벗으래야 벗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벗어버리면 인간 구원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던 그 하나님의 ‘이처럼’의 사랑은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을 그 육신에 박혀 살았습니다. 그 육신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서 제한을 받고 별의별 모욕을 다 당했습니다. 하늘의 왕자가 식민지 청년이 되고 땅의 원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육체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육체로 오신 성자 하나님! 우리들을 위해 33년동안 육체의 십자가를 지시고 사셨던 우리 주님을 묵상하며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누구는 자기의 육체에 만족을 느끼고 누구는 육신이 부담스럽고 짐이 됩니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 못하고 흙수저 인생으로 평생 산다는 것이 고통입니다. 병들고 늙어가고 거동하기 힘들고… 벗어버리고 싶은 육체의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지고 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육신의 십자가! 육체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감사하며 지고가야 합니다. 그 육체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육체를 잘 달래고 활용해가며 주님의 십자가 옆에 달렸던 강도처럼 우리도 그 옆에 끝까지 서 있기를 바랍니다.

제2의 십자가, 사명에 묶인 십자가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35절, … 그리스도이면 자신을 구원해보라

 

강도도 조롱합니다.

39절, 그리스도이면 나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가 있습니다. 손과 발에 박힌 못은 언제라도 빼버릴 수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각종 병자를 고쳐주신 능력자가 그 못 몇 개를 못 빼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못 들은 척! 못 본 척! 못하는 척!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만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명에 못 박혀 있습니다. 사명이 있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사명이 있어 조롱을 못 들은 척! 감내합니다. 그것은 사명이 있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지고가야 하고 달려 있어야 할 십자가이기에 별의별 악담과 조롱에서도 내려오지 못합니다. 사명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십자가를 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30세가 되던 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임직식이요 공적 생애의 출발입니다. 그때 사단이 세 가지로 유혹합니다(마4:1-11).

 

-경제적인 유혹(마4:3). 돌덩이를 떡덩이로 만들어라, 그러면 빵에 굶주린 백성들은 너를 쉽게 구세주로 추앙할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사람은 경제적인 동물입니다. 아무리 정의도 명분도 좋지만 돈이 없으면 사랑도 명분도 약화됩니다. 돈이라면 의리도 공의도 없습니다. 정치가들이 그런 백성들의 심리를 잘 알아 경제로 돈으로 표를 삽니다. 이게 바로 포플리즘입니다, 백성들은 자기 세금으로 자기들이 먹는 것을 모르고 공짜로 얻는다, 착각합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이 자꾸 이런 편한 정치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됩니다.

 

-명예의 유혹(6절). 일종의 과시의 유혹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고 천사들이 손으로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는 능력을 보이면 그 초인적인 능력에 감탄하고 너도나도 따를 것이라는 제안입니다.

 

얼마나 솔깃합니까? 가만히 있어도 유능하고 돈이 있는 자들이 제자를 자처하며 찾아올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선택하면 됩니다. 이력서를 보면서 여러 모양으로 쓸모 있고 단기간에 교육이 잘 되어 제자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할 제자들을 뽑으면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유혹(9절). 내 앞에 절하기만 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모두 주리라! 주님 앞에 놓여 있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배척당하고 모욕당하고 외면당하는 거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내가 주는 편안하고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받으라! 대단한 유혹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명의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겠지만 십자가를 등에 집니다. 그것은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성육신하신 것은 절대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교단 창립도, 존경 받는 일도, 세상 영광을 누리는 일도 아닙니다. 그건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미션 사명!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이 있었기에 주님은 사단이 주는 면류관을 거절하고 그에게, 떠나라! 내 쫓습니다. 주어진 사명의 길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은 사명의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국교회만 해도 언더우드 아펜셀러! 뭐가 아쉽겠습니까? 학벌 좋고 큰 교회 담임으로, 대학총장으로 청빙도 받고 얼마든지 좋은 길, 영광의 길이 있었지만 그들은 조선으로 들어와 모진 고난과 시련을 받는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사명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고난의 십자가를 팽개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안 그렇습니까? 오래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힘들 때가 있고 자존심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맞대응합니다. 자기 임무를 놓아버립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묵묵히 십자가를 감당합니다. 사명이 그들을 묶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명감이 있어 내려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고 견디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명감이 클수록 더 참고 손해를 보고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게서 배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런 십자가가 예수님의 좌우에 포진하고 목사의 좌우에 포진하고 견디어 줄 때, 사명감으로 제 십자가 지고 우뚝 서 있는 십자가가가 세 개가 아니라 30개, 3백개, 3천 개일 때 비로소 건강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명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어떤 유혹과 조롱에도 견디었던 주님의 십자가, 사명의 십자가를 끝까지 감당하기를 기원합니다!

제3의 십자가, 구속의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왜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까? 십자가는 죄를 묻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합당한 보응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죄중에서 죄악의 죄입니다.

 

양쪽 십자가에 달려있는 이들은, 33절 행악자, 39절 행악자입니다. 마태(마 27:38)와 마가(막 15:27)는 강도였다 합니다. 두 행악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나 아마 살인과 방화 등을 서슴지 않은 흉악범이었을 것입니다.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합당한 대가를 치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하에서 십자가형은 반역이거나 살인죄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강도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너무도 경건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친구 의사를 만나러 갔다가 매독환자 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매독환자로 오해를 받습니다. 같은 환자들이 낄낄거리며 조롱합니다.

 

“우리야 배운 바가 없어 그렇지만 당신은 뭔가 아쉬워서 이 짓을…”

“우리야 막 살아서 그런다 하지만 당신은 나가면 널린 것이 정숙한 여인들인데 어찌 이 짓을”

 

얼마나 모욕입니까? 당장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고 싶습니다. 이런 못된 이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느니 그거 다 때려치우고 십자가에서 내려 편한 길을 가고 싶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심리를 다른 작품이 그리스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입니다. 그의 동명의 작품을 마틴 스코세지가 감독하여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유다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게 사단은 최후의 유혹을 합니다.

 

‘그렇게 살아봐야 누가 알아주겠냐?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 자처하지 말라! 착각이다! 너를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면 좋게 않겠느냐! 십자가에서 내려가라!’

 

사단의 유혹에 흔들리어 예수는 잠시 환상 속으로 빠져들면서 여러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평범한 남자로 살면서 간통까지도 서슴지 않는 부랑배로 묘사됩니다.

 

이 책은 바티칸 교황청이 금서(禁書)로 지정하였으며, 마틴 스코세지가 영화로 만들었을 때 교회가 '악마의 필름' 으로 단정해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유혹 당했고 사단은 십자가에까지 올라와 ‘최후의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못에 박혀 그랬을까요? 내려가 봐야 로마제국과 싸워 승산이 없다 생각했을까요? 그래서 슈바이처는 희생정신의 모범을 보여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도록 모범적인 죽음을 당했다, 해석합니다.

 

그거 아닙니다. 주님을 붙들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못도 아니고 로마제국의 위용도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내려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이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버리지 못하는 것! 교회에서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 십자가를 내려놓고 달아나지 못하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들이 나를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고 오늘도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게 합니다. 사랑이 내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결론

고동(고둥, 소라)이나 다슬기, 달팽이 거북이… 무거운 패각(껍데기)으로 인하여 얼마나 불편한가요? 이동이 느리고 고동, 다슬기 복족류는 대부분 정지된 상채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그들을 힘들게 하고 무겁게 하는 패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살아남게 합니다. 패각이 벗겨지면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저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지고 간다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있기에 우리가 보호를 받고 사명자가 되고 구원을 받게됩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고전1:23)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구원을 보호하고 지탱해주는, 선박으로 치면 배의 중심을 잡아주는 밸러스터 탱크(ballast tank), 물탱크입니다.

 

세 개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는 아직도 단단합니까?

 

제1의 십자가, 육체에 달린 십자가!

제2의 십자가, 사명에 묶인 십자가!

제3의 십자가, 구속의 십자가

 

혹시 너무 느슨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힘들다. 버려놓고 달아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몫에 태인 십자가, 그 십자가가 우리를 정결하게 할 것입니다. 겸손하게 할 것입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있어 나를 더욱 보람있게 만들어 낼 것입니다. 구속의 십자가가 있어 십자가 앞에서 구원을 얻고 새생명으로 날마다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힘을 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주님의 옆에 달려 잘 감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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