架上七言 3言 '애정의 말씀'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를 부탁하시다
요한복음 19장 25~27절
서론
탈영병이나 인질범을 체포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 어머니들을 동원하여 자식들을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애인의 말도 듣지 않고 친구들의 말도 듣지 않던 흉악범들도 어머니가 누구야! 하고 이름을 불러가며 호소할 때는 열이면 열 다 무너집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행어를 낳았던 신촌의 인질범도 그 어머니의 호소에 자수했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나와서 아들을 향해 애타는 심정으로 자수를 설득시키는 것처럼 슬픈 어머니의 얼굴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죽일 놈이라고 해도 그 어머니에게는 사랑스런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흉악한 강도가 되었고 자수해도 감옥행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어머니는 아래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강도들만 달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강도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 모독죄로 고소당했고 달려있습니다. 아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서른 살이 넘은 아들은 발가벗긴 채로 달려있습니다.
그 모양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살인범의 어머니야 아들에게 자수하라는 설득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호소마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서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아들을 쳐다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남긴 세 번째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26절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27절 "보라 네 어머니라"
이 말씀은 남을 생각하는 배려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향하여 무한한 애정을 보이시며 제자에게 자신의 사후 어머니의 생애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광경보다 감동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예수님은 남의 고통을 더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지 한 두 시간이 지났을 것입니다. 손과 발목은 끊어질 듯이 아픕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아래를 쳐다봅니다.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 자신도 슬픔의 사람이었다면 육신의 모친인 마리아도 슬픔의 여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가 그 여인의 생애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아무 염려 없이 살았을 여인입니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어도 평범한 한 남자의 아내로서 행복하게 살아갔을 여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육신의 모친으로 선택되는 그 순간부터 마리아는 고난의 여인입니다.
예수가 갓 태어났을 때 성전을 찾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는 유아세례를 받기 위해서 성전을 찾은 것이지요.
성전에 신앙심이 깊었던 시므온 노인이 있었는데 마리아가 품에 예수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 때문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
그때만 해도 마리아는 그 예언의 뜻을 몰랐습니다.
예수가 서른 살이 되어가면서 시므온 노인의 예언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모함 * 귀신 들린 자로 몰아붙임
* 가는 곳마다 소란이 일어남 * 형제들끼리 묘한 감정
* 어머니에 대한 의심
이런 것들이 마리아의 가슴에 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질 듯 아팠겠습니까? 시므온 노인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머니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자신 때문에 받은 어머니의 고통, 자신이 죽은 후에는 얼마나 더 괴로워하며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인가요? 이런 저런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마리아를 이렇게 부릅니다.
"여자여!"
`여자여!'라는 말속에 들어있는 신학적 해석은 오늘은 접어두겠습니다.
"여자여" 라는 말은 최고의 경칭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훌륭한 여인이었음을 인정하며 높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경건했습니다"
"경건했던 당신의 품에서 살다 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런 경칭입니다.
뒤이어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는 것은 요한을 가리키면서 한 말씀 같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어머니를 끝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평생을 고생스럽게 살아왔던 한 여인의 고통을 돌아보셨습니다. 주님은 따뜻한 말한 마디로 그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지 못하겠거든 말이라도 좋게 하도록 노력하라"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더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따뜻한 위로를 남기셨던 예수님, 우리는 왜 그분의 인격을 배우는 데 이렇게도 더딜까요?
그것은 영혼 구원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새월 속에 좋은 말로 남을 세워주고 격려해 주는, 남에 대한 배려로 살아가도록 해요. 그게 입으로만 나라가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일보다 백 번 천 번 나은 것입니다.
2. 함께 서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는 얼굴들을 찾습니다. 남자 제자들의 모습은 요한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수제자로 키웠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가장 유능했던 유다는 은 30을 받고 스승을 팔았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줄행랑쳐 버렸습니다. 요한만 십자가 아래에 서 있습니다.
요한도 그냥 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도 알몸으로 달아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 서 있는 것도 어머니가 와 있기에 어머니를 보호할 목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서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자 제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지만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여자들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25절 "이모(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막 15:40, 41 "작은 야고보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그들은 멀리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입니다.
사실 그녀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빨래하며 양식을 구해오며 궂은 일을 도맡아했습니다. 좋은 일에는 끼지 못했습니다.
그런 여자들이 정작 주님이 가장 어려웠을 때는 옆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가장 큰 원군(援軍)이 되고 있습니다.
옆에 서 있다고 해서 물 한 모금 건네줄 입장이 못됩니다. 지금이라도 힘을 써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할만한 권세가 있는 여자들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변호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예수님 옆에 서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키며 그 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모두들 도망가고.... 하늘도 땅도 그를 받아주지 않으려고 높이 공중에 달리게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그의 편이 있습니다. 멀리서 따라온 여인들입니다.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는 못하고 있으나 외로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모두들 죄인이라고 외면하고 있는 예수,
그 십자가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바라보고 있는 그 여인들의 말없음. 그 말없음 속에서도 가슴으로 흐르고 있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읽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옆에 서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마리아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둔 어머니. 아무도 그녀의 편은 없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아들의 제자들도 모두 달아나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예수를 바라보며 욕하고 경멸하고 침을 뱉습니다. 양쪽의 강도들도 아들을 깔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 여인들이 서 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함께 따라온 여인들입니다. 빽도 없고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할만한 힘도 없는 여인들…. 그 여인들이 마리아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제 정신으로 쳐다볼 수 있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쓰러질 듯 하는 그녀를 붙들고 있는 이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옆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옆에 서 있는 사람들, 그것만으로도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조셉 베일러라는 여인은 한꺼번에 세 자식을 잃고 자기 손으로 묻었습니다. 한 아들을 앞세우는 것도 괴로운 일이거늘 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그 여자는 이런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난 슬픔에 앉아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곁에 와서 십의 섭리에 대해, 그리고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으며 무덤 너머에는 어떤 새로운 세계가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듣기에도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가 주기를 바랄 뿐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자리를 떴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내 곁에 앉았다. 그는 그냥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 말 없이 내 곁에 앉아있었다. 내가 뭔가를 말하면 그는 귀기울여 듣고 간단히 대답하고 조용히 내 손을 잡아준 다음에 내 곁을 떠났다. 난 그에게서 큰 감동과 위안을 받았다. 나는 그가 떠나는 것이 싫었다>
신앙생활을 너무 오래 하다보면 지나치게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온갖 좋은 말로 위로해 들려고 나섭니다. 하나님의 섭리라거니, 전화위복이 된다느니… 그러나 때로는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 울도록 놓아주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어설픈 말로 위로해 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학교에서 선행을 시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1등 상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을 했기에 상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무 일도 한 게 없어요. 자식이 죽어서 슬픔에 빠져있는 할아버지가 더 잘 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이에요"
그래요. 저도 그랬습니다. 내 인생에 가장 어려움을 겪을 때 정말 힘이 되어준 이들은 어설픈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내 옆에서 나와 함께 눈물 흘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 그들이 내 인생에 가장 큰 격려자가 되었습니다.
3. 십자가에 슬픔을 걸었습니다.
지금 마리아와 여인들은 십자가 아래에 서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십자가는 흉측하고도 부끄러운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이 가족 중에 있으면 결혼길이 막혀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인들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증표였고 슬픔을 걸어두는 푸른 나무였습니다.
앞으로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잊게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슬픔을 앗아가는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슬픔을 걸어두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에게서 내려오는 전설의 나무 이야기입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면 어느 곳에 `슬픔의 나무'가 있습니다. 슬픔을 걸어두는 나무입니다. 누구나 슬픔을 당하게 된 사람들은 그 슬픔을 가지고 슬픔의 나무를 찾아갑니다. 그들은 자기가 겪은 고통과 불행한 일들을 그 나뭇가지에 걸어놓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천천히 그 나무 주위를 돌면서 다른 사람들이 걸어놓은 슬픔들을 찾아봅니다. 자기 것보다 덜 불행하고 덜 고통스러워 보이는 인생이 있으면 그것을 자신의 것과 바꿔갑니다. 그러면 자신의 슬픔은 훨씬 더 가벼워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바꿔가기에.
그러나 누구든지 결국에는 다른 어떤 사람의 것보다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선택하게 됩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신의 인생이 덜 불행하고 덜 고통스럽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그곳에 도착했을 때보다 한결 더 지혜로워져서 슬픔의 나무 밑을 떠납니다.
마리아가 슬픔을 걸어둔 이후로, 십자가는 무수한 고통과 슬픔을 걸어두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슬픔의 나무 십자가에 그 슬픔을 걸었습니다. 남편을 먼저 땅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나무 십자가에 슬픔을 걸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의 슬픔을 다 걸어주는 신기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결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세 번째 남기신 말씀은 남에 대한 격려요, 애정이요, 사랑이었습니다.
당신 자신도 큰 고통을 겪고 있었으나 그분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남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함께 있어줌,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 늘빛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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