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架上七言1.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시다(누가복음 23:32~34)

갈렙처럼 2025. 3. 23.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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架上七言 1  '용서의 말씀'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시다

누가복음 23장 32~34절

 

서론

세상에서 33년을 살다 가셨던 예수님께서 남긴 엑기스와 같은 교훈은 무엇을까요? 병자를 고치시고 주옥같은 교훈을 전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러나 가장 위대한 교훈은 오히려 십자가에서 남기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처형장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교실입니다. 그것은 인간 구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십자가에서 남긴 말씀, 흔히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가상만 잘 이해를 해도 기독교의 복음의 진수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모두 아시는 것이지만, 가상칠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받으며 남겼다고 복음서에서 전하는 일곱 문장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절규, 누가복음에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하고, 회개한 강도를 안심시키며, 영혼을 성부 아버지에게 맡깁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고, 목마름을 호소하며, 자신의 지상 삶이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여러 구절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서사를 만드는 ‘복음서 조화’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위키백과)

 

예수님께서 처음 남기신 말씀은 뜻밖에도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33절,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지금도 아래에서 모욕하는 상황에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신을 저주하고 모욕하는 자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 무고하게 괴롭히는 자들을 위한 용서는 예수님의 생애가 어떤 삶이었는가를 말해주며, 아울러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기도는 위대한 사역입니다.

누가복음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삶을 마무리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기도를 통하여 엄청나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고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각색병자들을 고쳐주심, 죽은 자를 살리심, 제자 양육…. 그처럼 위대하셨던 분이 지금은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손은 더 이상 병자들을 위해 일할 수 없다.-손이 박힘.

주님의 발은 불쌍한 자들을 찾아 나설 수가 없다.-두 발이 박혀있기에.

주님은 더 이상 제자들을 가르칠 수 없다-제자들이 도망가 버림.

 

이적도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직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분은 끝난 것일까요? 십자가 위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초조한 심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그때도 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어떤 사역인가요? 기도의 사역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래에서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 군병들이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수천 명씩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와 같은 효과적인 역사와 놀라운 구원사역들은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옵니다. 노쇠해지고, 병들고,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연세 있으신 성도님들께서 “저는 교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뜻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입술을 열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설교자를 위해 기도함으로 목회에 동역 할 수 있습니다.

 

스펄젼. 노부인의 장례식에서 가장 훌륭한 동역자라고 소개했습니다. 할머니 신자는 새신자가 오면 그 카드를 갖고 집으로 갑니다. 그녀는 계속 기도만 합니다. 그러면 새신자들이 잘 적응하고 믿음이 성장합니다. 훌륭한 기도의 동역자입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옵니다. 그때 주님의 기도를 생각하십시오. 기도는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한 사역입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그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저는 목회를 하는 동안에, 무엇보다도 기도해주시던 사람들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배후의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여러분들은 저의 훌륭한 파트너들입니다.

2.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해야 할 사항이 많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달라고 자신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은 남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그것도 용서를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용서해주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사방에 있는 자들이 모두 대상입니다. 멀리서 따라온 갈릴리 여인들 외에는 모두가 원수였고 원수처럼 처신했습니다.

바리새파-사두개파-로마군병, 좌우에 달린 죄수들, 지나가던 행인들,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스승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흩어졌습니다.

 

다 밉고 서운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의 기도를 하십니다. 그들의 무지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몰라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용서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제비꽃이 자기를 짓밟는 구두에 향기를 풍기는 것"

 

주님은 아래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용서의 기도를 하십니다. 좌우의 강도들을 향하여도 용서해 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향기를 풍겨주는 것입니다.

 

용서란, "사나운 말로 공격하는 이들에게 부드러운 말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사람들은 온갖 말로 흉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부드럽게 대하셨습니다. 몰라서… 몰라서 저런다,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대할 때 세상에 용서해 주지 못할 사람, 용서해 주지 죄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에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 한 부유한 상인이 우연히 가난한 노인과 마주앉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드러내 놓고 노인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드름을 피우면서 그의 초라한 차림새를 경멸했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역에 도착했을 두 사람은 같은 역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유럽에서 오는 어떤 성자를 마중하기 나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초라한 노인이 성자(聖者)였습니다.

 

부자는 그 성자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했고, 그에게 드러내놓고 모욕을 준 것에 대해서 부끄럽기도 해서 사람들을 헤치고 노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마침내 노인 앞으로 다가간 부자 상인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소. 용서를 받으려면 당신은 세상에 있는 가난한 노인들을 한 사람씩 전부 찾아다니며 일일이 용서를 구해야만 할 것이오"

 

루이스 B. 스미스는 《"우리 용서하며 삽시다》에서 남을 미워할 때마다 천사가 와이셔츠 단추만한 것을 가슴속에 떨어뜨리기에 함께 고통을 겪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미움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용서는 얼마나 나 자신을 위해 선한 일입니까.

3. 용서는 위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걸 스스로 봉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봉인이 풀리면 그분은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도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던 죄인 여자에게도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에게도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권세를 포기하셨습니다. 봉인된 죄사함의 권세를 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계실까요?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죄인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신적인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권위의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죄인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분은 권세를 포기하고 자기의 연약하심으로 남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용서를 통해, 기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권세는 있을 때 조심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링컨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 그를 가장 심하게 비난한 사람은 에드워드 스탠턴이라는 사람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탠턴은 링컨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링컨에 대한 미움이 너무도 뿌리가 깊었기에 링컨의 신체적인 외모에 대해 ‘고릴라’라며 조롱을 일삼았습니다.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내각(內閣)을 구성하는 데 스탠턴을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측근들이 일제히 반발했고 온갖 조언이 링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각하. 그를 잊으셨나요? 그가 얼마나 각하를 비난했다는 것을…”

링컨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잊지 않았소. 그럼에도 스탠턴만큼 그 자리를 잘 훌륭히 수행할 사람은 없소!”

 

얼마 지나지 않아 링컨은 암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때 그의 시신을 붙들고 가장 많이 운 사람이 스탠턴입니다. 스탠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이 위대한 인물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에 남을 것입니다”

 

링컨은 평소에도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을 공석에서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늘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원수는 우리 마음에서 없애야 한다!”

 

이것이 그의 생활신조입니다.

“원수는 죽여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만들어서 그 원수를 없애야 한다!”

 

그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한 것은 십자가의 못이 아닙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붙들어 맬 수 있도록 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는 그 힘이 그를 십자가에 붙들어 매어놓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들이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사랑과 용서의 힘입니다. 목회자들이 힘이 없어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힘 대신에 자기의 힘을 마음껏 발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감화력이라는 게 없습니다. 주님을 본받으십시오.

 

결론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전 친구와 크게 싸움을 했습니다. 화가 난 나머지 동료의 얼굴을 가룟 유다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원수 같은 친구의 얼굴이 유다로 더불어 대대에 전해지게 하려는 흉계였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 하는데 며칠을 애써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의 얼굴만 떠올랐습니다. 그는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었습니다. 다빈치는 즉시 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그 친구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머리에 예수님의 얼굴이 뚜렷이 떠올랐습니다.

 

유명한 여배우 브리짓드 바르도는 동물애호가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이 싫어졌어요. 인간 알레르기에 걸렸어요. 그래서 외출을 하지 않기로 했지요. 남자는 모두 미워요!”

 

힘의 용사 삼손은 죽음의 순간에 그 힘을 원수 갚는데 사용했습니다. 주님은 위대한 힘을 원수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미움과 증오심을 품고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힘은 바로 용서에 있습니다. 용서하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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