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이 뚫렸다!
마태복음 28장 1~6절
서론
언젠가 농업협동조합 은행의 전산망이 뚫려서 농협이 초비상이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카드 사용내역이 삭제되고 이로 인해 농협이 면제해 준 수수료만 500억 원대에 달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손실이 발행할지, 농협은행 고객 188만 명은 인터넷으로 사용내역을 조회 못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해킹에 의해 은행의 전산망이 뚫리다니…, 앞으로는 은행에 예치되었던 돈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는 은행이 뚫리던, 이메일 주소가 뚫리던 별로 상관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럴 때는 마음 편합니다.
오늘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절은 죽음의 방호 문이 뚫리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돌아온 날입니다. 굉장한 날이 아닌가요? 너무 굉장하기에 사람들은 부활절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절을 기독교의 만우절이라 할 거예요! 부활절로 거짓말을 일삼는다고요! 하지만 부활절은 기독교만의 블루오션입니다. 불루오션은 경제용어인데 경쟁자가 없는 유망한 시장을 가리킵니다.
불교에도 석탄일이 있어요! 불당도 있고 불찬가도 있고 불경도 있습니다. 계명도 있고 기독교의 사랑에 맞먹는 자비와 자선도 있어요! 요즘에는 주일학교를 따라서 어린이불교학교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은 모두 벤치마킹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벤치마킹할 수 없습니다. 불교만이 아니에요. 어느 종교도 부활만큼은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부활교리도 없을 뿐 아니라 그동안 너무 자기 교주들의 무덤을 선전했거든요.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마호메트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의 무덤은 중국 곡부성에 있습니다. 석가모니를 따르는 사람들은 석가모니 몸에서 나왔다는 사리(舍利)와 뼈 조각을 너무 많이 자랑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수덕사에도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셨다는데 이것이 부활을 벤치마킹을 할 수 없게 발목을 잡아버린 것입니다.
기독교는 달라요! 만약 예수님의 뼈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 날로 산산조각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인격체에 기초를 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들은 기독교의 부활을 조롱하면서도 부활교리를 너무 부러워합니다.
사실 부활교리가 얼마나 황홀합니까? 그래서 윤리적인 설교보다 기독교의 불루오션 부활교리 등을 말할 때는 자신이 있어요! 왜? 윤리와 행함을 전할 때는 나도 그렇게 제대로 살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설교는 하면서도 미안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나 부활… 등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전할 때, 그 의미를 해석할 때는 힘이 납니다! 내가 제대로 살건 못살았건 예수님은 진리이고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힘이 나는 것입니다.
1. 죽음은 열쇠가 없는 유일한 문입니다.
인류 역사에 몇 명이나 살다갔을까요? 지금 인구만도 60억이 넘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블랙홀은 수많은 인류를 잡아먹고서도 “아직도 나는 배가 고프다!” 고 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블랙홀에 빠지면 누구나 인정사정없습니다. 태아(胎兒)조차도 블랙홀에 빠지면 나올 수 없습니다.
죽음은 문은 인류 역사에 열쇠가 없는 유일한 자물쇠입니다. 모든 자물쇠에는 열쇠가 있습니다. 열쇠를 만들지 않으면 자물쇠는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동차가 성능이 좋고 멋지고 비싸도 브레이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시품은 될 수 있어도 10미터도 갈 수 없는 쓸모없는 기계입니다. 자물쇠도 그래요. 열쇠가 있으니까 자물쇠가 비싸게 팔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은 열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양면성입니다. 밝은 낮과 어두운 밤, 해가 있으면 달이 있고, 땅이 있으면 강물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음(陰)이 있으면 양(陽)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에는 유독 열쇠가 필요 없습니다. 다시 열리지도 않고 열릴 필요도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열쇠를 만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죽음의 문에 열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죽어 하나님 앞에 갔는데 사정을 합니다. 하나님, 내게는 두 살짜리 딸이 있습니다. 내 딸이 자라 결혼할 때까지만 아이 곁에 엄마로서 있게 해주세요! 그래? 다시 돌아가거라! 열쇠로 죽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저는 결혼을 이틀 앞에 두고 자동차사고로 죽음의 문에 들어왔습니다. 결혼상대자가 너무 불쌍합니다. 그래? 다시 돌아가거라! 열쇠로 문을 열어주시고… 저는 고학으로 신학교를 졸업했는데 목회도 못 해보고 결핵에 걸려 죽어서 너무 억울합니다. 20년만 목회를 하다 오고 싶어요. 그래? 너도 다시 돌아가거라! 열쇠로 문을 열어주시고… 너는 왜 가만히 있느냐? 저는 여기가 좋습니다. 돌아가 봐야 그 영감과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 너에게는 열쇠가 필요 없구나… 너는 여기에서 살아라….
뭐, 이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죽는 것도 해볼만 하잖아요? 내가 죽어서 우리 자식들 부의금(賻儀金) 받아 그동안 뿌렸던 것 다 회수했고… 공짜로 천국지옥 관광까지 했고… 오기 싫으면 그곳에 머무르면 되고… 나름대로 죽음도 괜찮지 않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한번 닫히면 열어주는 열쇠가 없어서 그래요. 아무리 애걸복걸하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울부짖어도 죽음의 문은 참 냉정합니다. 죽음의 문을 열어주고 싶어도 열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왜냐? 지옥은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사탄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사탄을 가둘 무저갱이 지옥입니다. 사탄을 다시 빼낼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 죽음의 문 열쇠가 소용이 없습니다. 천국문은 너무 좋아서 올라가면 내려올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아요! 그래서 천국문도 열쇠가 필요 없다 보니까 모든 죽음의 문에는 열쇠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죽음의 터널에 들어가면 나오지를 못합니다. 죽음의 문을 열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어떤 종교가도 영웅호걸도… 심지어는 930세를 살았던 아담도…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40년을 엄청난 기적을 행사했던 모세조차도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죽음의 문에는 열쇠가 없어서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로 다시 살아나왔습니다. 죽음의 방호문을 뚫으신 것입니다. 대단하신 분입니다. 어떻게 그 방호벽을 뚫고 살아나오셨을까요?
2. 부활무덤은 하나님이 여셨습니다.
2절, “큰 지진이 나며…” 큰 지진이라면 어느 정도일까요? 3월 11일(금), 오후 2시 46분 일본 동북부 센다이지역에 진도 9.0이라는 강진(强震)이 발생했습니다. 쓰나미와 지진으로 원전이 파괴되고 방사능 유출로 일본이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무덤 앞의 지진은 규모가 어느 정도일까요?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의 강림을 뜻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옥(獄)터가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지진’이 꼭 강진(强震)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무덤의 문-죽음의 문을 흔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문은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견고한 문입니다. 미사일도 뚫을 수 없고 핵폭탄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사탄도 이 문은 열 수 없습니다. 완전히 인봉해 버린, 열쇠조차 없는 문입니다.
로마 베드로성당에 약간 유사한 문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 오른쪽 문이 ‘속죄의 문’입니다. 다른 문들은 매일 열리는데 ‘속죄의 문’은 25년 만에 한번 열립니다. 그 문을 통해 들어가면 지난 25년 동안의 모든 죄들이 사함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문은 자물쇠로 잠근 것이 아니라 아예 콘크리트로 봉했습니다. 2000년에 열렸으니 2025년에 다시 열립니다. 25년 동안 지은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니… 참 대단한 문입니다.
로마대성당의 속죄의 문은 25년에 한번씩이라도 열리지만 죽음의 문은 한번도 열린 적이 없습니다. 녹슬기도 하고 대전차포를 발사하더라도 열 수 없는 이 문이 큰 지진으로 열렸다는 것은 죽음의 문은 하나님만이 열어놓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왜 안 그러겠어요? 아기를 출생시킬 때도 죽을 고생을 하는데 죽은 사람 살려내는 일이야 말로 죽을 고생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1월에 용종을 떼어낼 때 40분이나 너무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여자 집사님에게 이제야 출산의 고통을 알겠다고 했다가 몰매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용종 떼어내는 일을 어찌 감히 아기를 낳는 진통과 비교하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종 떼 내어 보았어요? 하고 물었더니 다섯 개나 떼어냈다는 겁니다. 용종 떼어냄은 출산의 진통에 비할 바가 아니라니 그 진통이 얼마나 아플까요? 끔찍해요!
열 달 동안 뱃속에 살고 있던 생명을 세상으로 출산하는 것도 이렇게 힘들고 아프거늘 온전히 죽어있는 시신을 살려내고 무덤 밖으로 내놓은 일은 힘들고 말고 할 이야기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왕림하시고 개입하셔서 3일 동안 죽어있던 예수님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무덤의 바위 문을 열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누가 살려내셨어요? 하나님이 살려내신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외에는 죽음의 문을 열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창조자의 권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사람이 때가 되어 죽는 일은 자동적으로 되었지만 죽음에서 살아나는 일은 한번도 실행되어 보지 않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죽으면 저절로 육신은 썩고 흙이 되고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인 인간 운명 속의 프로그램입니다. 너도나도 이런 프로그램 속에서 진행되어 나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만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계셨던 성자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성자는 육신과 함께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생명을 갖고 계십니다. 육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영생의 생명-신성(神性)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있었기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신성(神性)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죽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문을 열고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자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예수라는 육신을 입을 때 다시 살려주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절대복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그 육체를 살려내셨습니다.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죽은 후에 다시 살려주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문을 열고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 모든 말씀이 참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정해주지 않고 유대교권자들처럼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아셨다면 살려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천하에 선포하고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죽음도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죽음이 문을 열어준 것은 인류 역사상 딱 한 사람! 그 외에는 다시 블랙홀이 됩니다.
3. 예수님의 부활무덤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바울은 <부활장> 고전 15:20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활시키기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시간적으로는 당장은 아니어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모든 사람들의 무덤 문을 활짝 열어 제친다고 합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살아납니다. 불신자는 지옥으로, 믿고 죽은 사람들은 천국으로 올라가기 위해 살아납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예수님이 부활을 첫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전까지는 인간 세상에 부활이라는 것이 긴가민가했습니다. 누가 부활하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외국산 유실수를 얻어다 심었는데 한번도 열매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나무를 주면서 열매를 맺는다고 말해주었지만 10년이 되어도 열매가 없기에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첫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떻게 됩니까? 아, 이 나무는 열매를 맺는구나… 이 나무만 아니라 같은 종류의 나무에는 그처럼 맛있는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우리의 육신도 죽음에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일이기에 예수님에게 붙어서 죽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십니다.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에밀리 페넬(26)이라는 미국 여인이 캘리포니아대(UCLA)병원에서 손(手) 이식 수술을 받고 물건을 집을 정도의 손(手) 기능을 되찾았습니다. 페넬은 5년 전 교통사고로 오른손을 잃고 난 뒤 왼손으로 살아왔습니다. 여섯 살 딸아이를 좀 더 잘 돌보기를 원하던 차에 죽은 사람의 손을 기증 받아 이식(移植) 수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사례는 미국에서 13번째이며 손가락도 약 60%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답니다.
죽은 손(手)도 살아있는 손에 이식(移植)되니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도 죽은 자에게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분에게 붙어있으면 살아납니다. 그녀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은 첫 번째 성공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무덤 문을 열어 젖혔던 첫 부활자입니다. 우리도 죽음 문에서 다시 살아나올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문을 열었던 죽음의 문이 이젠 우리에게도 활짝 문을 열어줄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결론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다섯 가지 명제를 들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는다, 죽어도 혼자 죽는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안 죽을 사람은 없다, 죽음 그것은 나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임종시에 아들 솔로몬에게 “내가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니”(왕상 2:2)라는 말로 죽음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죽음 문에 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힘이 되고 고마운 것입니다.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고 용기를 말하는 것은 지식입니다. 부활신앙! 이걸 믿어야 진짜입니다. 그 전에는 기독교 지식에 불과합니다. 십자가와 부활까지 가야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믿음의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죽음 앞에서 죽음의 문이 토해 내치게 될 것입니다. 부활절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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