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전적 타락 완전 부패
로마서 1장 28~32절
서론
어떤 분에게 “성격이 참 좋은 것 같아요”, 했더니 옆에서 누가 그래요! “그 사람 성깔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격입니까? 무던합니까, 성깔이 있습니까? 그 성격은 부모에게서 온 선천적인 것입니까, 살다보니 생겨난 후천적인 것입니까?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학설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이 중국에서 태동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입니다. 맹자(孟子)의 성선설은, 인간 본성은 원래 선한 것인데 환경이나 교육의 영향을 받아 계속 선하게 남아 있거나 아니면 악해진다는 것이고 순자(荀子)의 성악설은 사람은 아예 악한 본성(本性)을 타고 출생한다는 윤리사상입니다. 성선설과 반대개념으로 사람은 후천적 영향으로 악한게 아니라, 아예 출생할 때부터 악한 욕망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두 학설 중에 심정적으로 와 닿는 것은 성선설입니다. 천진난만한 아기를 보면 죄가 있을 것 같지 않고 내 자녀들의 아기 시절, 귀여운 모습만 추억하는 분들에게는 사람이 잘못되는 것은 전적으로 환경이나 타인의 잘못된 반응 때문이지 태생은 선하다, 생각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성선설, 성악설 어느 쪽일까요? 양쪽 모두 아닙니다!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은, 서로 다른 주장처럼 보여도 사실은 하나입니다. 태어날 때 선하다, 악하다…, 관계없이 모두 도덕적 수양을 하면 성현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 본성을 설명하는 데는 이론(異論)이지만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일에는 종교와 교육으로 가능하다, 에는 동론(同論)입니다. 그래서 성선설과 성악설을 기초로 출발한(맞는 표현인지는…) 유교는 인간의 선행, 사람의 도리(道理)를 강조합니다.
바울의 선언
성경은 근본부터 이 분들의 주장과 달리합니다. 성경은, 인류 모두가 죄인임을 선언합니다. 그 사람 속에 죄를 지을 본성이나,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행동이나 생각의 죄 이전에 인간은 신분 자체가 죄인으로 잉태되고 출생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인정합니다.
인류가 왜 이렇게 죄인이라는 동일 신분으로 태어날까요? 갓 태어난 아기들은 천진하고 순진한데 말입니다. 창조자 하나님과 첫 인간 사이에 맺어진 ‘대표 원리’에 근거해서 그리되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그 혈통들도 명령에 순종한 것으로 여겨주셔서 아담에게 주시는 영생에 참여하게 되지만 불순종으로 계약을 파기하면 자손들도 함께 형벌에 동참하게 된다는, 이런 대표 원리에 아담은 좋다! 도장을 찍었습니다.
결과는 불순종의 죄로 아담은 죄인 신분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자동적으로 아담의 혈통은 육체 모양이나 오장육부도 동일하게 출생하는 것처럼 태어나면서 죄성도 동일하게 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신분이 죄인의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한 죄의 신분인 자식들을 낳고… 이런 연결고리로 죄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간 혈통은 모두가 죄인의 신분입니다.
이런 인류의 고리를 꿰뚫어 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합니다(롬3:23, 엡2:23). 살인자, 범법자만 아니라 석가나 공자, 무함마드… 등 성현군자들조차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허어~ 바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살았던 석가나 공자를 최고의 성불(成佛), 성현(聖賢)으로 숭배하는 분들에게 죄인이라 갖다 붙임은 예의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래서 기독교는 독선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의문하는 분도 있겠지요.
바울은 무슨 배짱으로 인간을 총망라하여 죄인이라 도매금 판단을 하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내린 선언입니다. 바울이 이를 받아 선포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성경 저자들도 한결같이 바울의 주장과 같이합니다. 인간은 출생 전에 이미 죄인의 신분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의와 거룩과 지식을 따라 선하게 창조되었던 인간이 모태 중에서 죄악의 신분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신분을 최고의 우위에 두려는 인본주의자들에게는 수긍할 수 없는 모욕적인 주장이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인간의 전적부패를 말합니다.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 정도가 아닙니다. 성악설은 도덕이나 수양으로 도덕적 완성을 이룰 수 있다 하나 성경은 인간은 철저히 타락했기에 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행위계약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고 잘라버립니다.
원죄와 자범죄
인간의 죄는 원죄와 본죄로 나뉩니다. 원죄(原罪)는 첫 조상 아담에게서부터 온, 원래부터 있는 죄이며, 본죄(本罪)는 원죄의 영향으로 내가 짓는 죄라 해서 자범죄라고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지니며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자범죄가 육신에 숨어서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행위언약(내 행위에 내가 책임진다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깨버렸습니다. 아담의 죄성은 대표 원리에 근거해서 모든 후손 혈통에 영향을 끼쳐 인간은 죄의 신분과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이 상태가 원죄입니다. 모든 자범죄의 내적 근원, 인간의 인격과 행동을 더럽히는 자범죄의 뿌리가 원죄입니다.
아담의 죄는 고스란히 후손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전가’는 외길의 산등성을 올라가는 데 산 위에서 큰 바윗돌이 굴러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큰 바윗돌에 안겨 함께 굴러내려 갑니다. 아래 쪽 사람 모두가 계속해서 이런 결과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원죄입니다. 아담이 우리 대표자로 범죄한 이래, 아담으로부터 굴러온 죄는 우리가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함께 죄의 바윗돌에서 굴러가며 아담 안에서 유죄(有罪)가 되는 것입니다. 유죄는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7세기 인본주의적 성격이 강한 알미니안파와 현대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원죄를 부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원죄를 말하고 있습니다(롬5:12~19).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의 죄책을 전가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도덕적 오염도 상속받았습니다. 온 인류는 원시적 의(義)를 박탈당하는 동시에 죄에 대한 적극적 성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태 중에서 이미 죄인이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성경적 고백입니다. 흑인은 검은 아기를 낳고, 백인은 살결이 흰 아기를 낳습니다. 이런 원리는 영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의인은 의인 자녀를 낳고, 죄인은 죄인자녀를 낳고, 종의 신분은 자기와 같은 종의 신분 자녀를 낳습니다.
아담도 자기를 닮아 죄인 된 자녀를 낳았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신체적 DNA를 받아 두 눈, 두 귀, 입… 등의 신체적 모양을 닮았듯이, 영적으로는 아담의 죄성의 DNA를 받아 죄인으로 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인의 신분만 아니라, 도덕적 오염까지도 상속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받은 의와 거룩을 박탈당하였고, 죄를 좋아하고, 죄 쪽으로 기울어지는 죄의 성향을 갖고 잉태되고 출생하고 죄와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오염도(汚染度)
방사선에 노출되면 오염되고, 바다도 자연공해로 오염이 되고…. 생명에 치명적인 100% 오염이 있고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는 약간의 오염도 있습니다. 죄의 오염도는 100%! ‘전적 부패’(全的腐敗)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죄에 오염되었기에 인간성 자체가 죄성입니다. 전적 부패의 죄성은 어떤 의미의 선을 행할 수 없다거나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예찬의 감각… 등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행을 행할 충분한 선은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인정할만한 수준의 선은 조금도 없는 상태로의 부패를 말합니다(요5:42, 롬7:18, 고후7:1, 엡4:18). 아담으로 전이가 된 원죄의 탓입니다.
죄로 오염된 인간들은 교육으로 도덕심으로 옷을 입지만 인간 본성에는 동물에게 없는 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바울은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가 아니면서도 인간 내면을 갈파합니다.
28~31절,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인간육신은 뼈로 중심을 이룹니다. 살이 빠져나가면 인간은 뼈만 남는 흉한 몰골이 됩니다. 오장육부에는 별의별 미생물, 기생충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 육신 자체는 사실은 화장실입니다. 깨끗한 척 하지만 사실 육신은 ‘거시기’(便)를 안고 다니는 화장실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육신보다 더 추한 것은 우리 내면이다!
예레미야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라고 합니다.
21개의 죄목! 합병증도 이 정도이면 말기입니다. 어느 짐승들이 이런 죄성이 있습니까? 27절,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쓰기를 버리고…” 라고 합니다. 어느 짐승이 이런 동성애가 있습니까? 짐승은 발정기에만 짝짓기를 한다는 데 인간의 음욕과 야수성은 끝도 없으니…, 어떻게 보면 괴물은 인간성 자체가 괴물적입니다.
너무 인간을 폄하해서 기분이 나쁜가요? 이것이 인간의 원시적 죄책이고 죄에 오염된 인간 내면입니다. 짐승들은 원죄가 전가되지 않았기에 본성을 따라 야수성은 나오지만 사기, 이간질, 악한 생각, 수군거림, 비방… 이런 죄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죄가 그만큼 무섭고 더럽고 인간성을 파괴합니다.
율법과 복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해서 죄를 없애는 방도를 주셨습니다. 율법과 제사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민으로 살아갈 규범들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무기력한 존재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율법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율법은 율법을 대하는 내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지는 법칙입니다. 온전히 율법을 준수함은 처음부터 인간이 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인간에게 어떤 정도(正道)를 요구할 때 그것은 도달 불가능을 전제로 합니다.
자동차법규는 우리에게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법입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지킬 수 있는 기본법입니다. 그래야 내 생명이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로교통법은 개인의 성품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100% 이상의 속력을 내지 말라! 성미가 급한 사람에게 고속도로에서 100% 이하의 주행은 힘든 일입니다.
평생을 도로교통법대로 지키며 산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범법합니다. 범칙금 통지서가 날아오지 않아서 그렇지 교통카메라에 걸려도 직원들이 다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알고리즘을 걸어놓으면 요만한 위법도 다 걸리게 됩니다. 평생에 걸쳐 위반사실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법도 완벽하게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주어진 높은 수준의 거룩한 법들이 완벽하게 지켜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행동으로는 지킨다 해도 마음으로까지 완벽하게 하나님의 커트라인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행동의 죄밖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의 죄에 대한 생각-범의(犯意),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있는 ‘미필적고의(未必的 故意)’ 죄성이 없는 사람은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다, 성경의 주장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급(級) 수준인 율법을 주신 것은 “문자 그대로 100% 정확하게 지켜라!” 는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지켜보되 100% 완벽하게는 지킬 수 없는 한계상황을 직시하라, 열심히 지키되 못 지키면 인간의 죄성을 알고 내 죄를 사면(赦免)해 줄 분에게 맡기며 살라, 이것이 율법의 목적이요 다음 단계가 제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의 1차적 근본 목적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선이 전혀 없는 무능한 인간, 짐승제사를 통해서 오직 구세주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다가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힙니다. 비싼 대형 거울 한 쪽에 살짝 금이 갔습니다. 대형거울의 크기, 가치에 비하면 아주 작은 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하찮게 보이는 흠이 거울의 상품가치를 절대적으로 하락시켜 버립니다. 율법은 그것을 완벽히 지키고 의인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인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기에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짐승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긍휼을 얻고 죄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랜 후에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이스라엘은 이걸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을 의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고 짐승제사의 본 취지는 놓아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 죄가 얼마나 크고 부패했는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생들이 율법을 지킬 수도 없고 지켜봐야 의의 신분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구원해 주실 구세주가 소용없다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처럼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죄인된 신분을 인정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백성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론
처음 교회에 와서 인정하지 못했던 게 무엇입니까? 죄! 죄인!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소서~ 이런 자기 비하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왜 이리 폄하하는가, 언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신분이라고 하더니만 지금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여기서부터 기독교는 출발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는 “구세주가 절대 필요하다!”는 갈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철저한 죄인신분이 아니고 어느 정도 선행을 통한 구원의 길이 있다면 기독교만이 내세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원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해 준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십자가의 속죄사역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며,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기에 사람들은 종교와 도덕과 윤리를 운운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자범죄를 없애고, 인간의 품성을 높여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원죄 상태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원죄가 해결 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자범죄 없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개인의 행위가 인간 수준에서 깨끗해도 원죄가 있는 한은 사함도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자범죄가 매우 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원죄가 사함 받았다면 어떤 죄도 구원받습니다. 너무 간단하고 쉽지 않습니까?
그러니 복된 소식,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를 ‘종교’라 쓰고 ‘복음’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귀한 복음의 도리를 꽉 잡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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