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 설교

[뜻을 정하다] 공부 못 하는 사람의 7가지 방법(마태복음 6:5~8)

갈렙처럼 2025. 2. 1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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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못 하는 사람의 7가지 방법

마태복음 6:5~8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들을 만날 때마다 새벽 이슬이 영롱한 아침 들판을 걷는 것 같습니다. 새벽 이슬과 같은 청소년 여러분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의 7가지 이상한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혹시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있더라도 기분 나빠하지 말고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특징은 꼭 이상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은 그냥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호들갑을 떨 만큼 떨면서도 공부를 못합니다. 청소년 여러분, 믿음생활에도 이와 같은 호들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평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통파 유대인들입니다. 이스라엘에 바리새인들은 6천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모세 오경을 지키며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을 뿐 아니라 시원치 않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호되게 야단을 치는, 소위 “티내고 믿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은 당연히 경건해야 하며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종교생활을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종교생활은 열심히 했는데 종교생활을 그릇된 마음과 방법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공부 못하는 사람의 이상한 7가지 방법>이라는 내용을 읽게되었을 때 잘못된 공부와 잘못된 신앙생활은 비슷한 데가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 공부 못하는 학생의 7가지 이상한 방법

첫째,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신체상에 이상한 변화를 줍니다. 삭발을 한다든지, 수염을 기른다든지, 어떤 학생은 새끼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답니다. 공부를 하면 되지 뭘 그렇게 표나게 할까? 이런 학생들일수록 오래가지 못합니다. 친구들에게 집안에서 요란만 떨었지 오래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하고 맙니다.

 

둘째, 과격한 방법으로 공부하는 표시를 나타냅니다. 책상에 시퍼런 식칼을 꽂아놓거나 천장에서 내려뜨린 올가미를 목에 건답니다. 졸음을 방지를 위해서라나요.

 

셋째, 남이 할 때는 안 하고 안 할 때는 합니다. 수업시간에 딴전 피우다가 성탄절 때나 명절 때 꼭 책가방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을 나선답니다.

 

넷째, 공부하는 방법이 요란하고 게걸스럽습니다. 온갖 소도구들을 다 동원합니다. 형광 펜은 기본이고 형형색색의 필기구와 포스트잇이라는 붙임 종이 등 그리고 간혹 영어 단어를 외운답시고 사전을 염소처럼 뜯어먹습니다.

 

다섯째,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 준비기간이 길고 복잡합니다. 거창하게 계획부터 짭니다. 몇 시 기상, 취침, 언제는 영어, 언제는 수학, 언제는 휴식할 것인지 깔끔하게 시간 계획을 짜는 데 시간을 다 보냅니다.

 

여섯째, 뭐가 제대로 없어서 공부 못한다는 핑계를 댑니다. 공부방만 있으면 잘할텐데, 자명종, 참고서. 책상 위의 스탠드… 수없이 소도구를 장만합니다.

 

일곱째, 공부하는 티를 무지하게 냅니다. 우선 집안 일을 다 면제받으려 하고 가족 모두가 자기 시중을 들어야 하고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시키면 “나 지금 공부중인데…” 하는 말로 때웁니다.

 

이런 학생들일수록 공부 결과가 시원치 않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오면 꼭 누구를 원망합니다. 그리고 변명할 구실들을 내놓습니다.

 

어떻습니까? 주변에 이런 친구들이 없습니까? 바로 옆에 있다고요? 방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못하면 못하는 것처럼 하면 공연한 기대라도 하지 않습니까? 잔득 폼만 잡아놓고 부모님들 기대만 걸게 해놓고 꽝! 아이고 망신살!

2. 신앙생활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이상한 방법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 꼴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아주 좋게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분리주의‘를 주장합니다. ’바리새‘가 `분리’를 의미합니다. 혈통으로 분리, 종교로 분리, 지역의 분리, 성별의 분리, 복장과 형식에서의 분리를 주장했습니다. 자신들은 분리된 자들임을 공공연하게 내세웠습니다.

 

처음에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분리를 했습니다. 죄에서의 분리, 옳지 못한 것에서의 분리, 거짓에서의 분리…이것이 바로 성별(聖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분리는 형식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삶의 분리, 참된 행동의 분리, 거룩한 마음으로의 분리에 힘써야 하는데 점점 외적인 것으로 자신들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표시나 복장으로부터 분리를 시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인 것을 외부적으로 표시했습니다. 거룩한 몸짓, 언어, 복장을 선택했습니다. 치렁치렁 긴 옷을 입었습니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신령한 인물처럼 언어도 변조된 음성을 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시간으로 자신들을 차별화 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3시 제6시 제9시 기도시간입니다. 우리 시간으로는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시간에는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골방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시장에 나가서 일을 보다가 기도 시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순수하게 기도 약속을 지키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를 듣고 사람들이 참 마음으로 칭찬합니다. 굉장한 믿음의 사람이구나, 기도의 사람이구나, 진짜 바리새파 인이구나… 그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일부러 기도 직전에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일을 보다 늦어지는 척 하다가 시간이 되면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선행(善行)을 기도로 광고했습니다. 이상하게 신앙생활, 기도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 못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신앙방법입니다.

 

우리 큰애가 기숙사학원에서 재수를 했습니다. 하루는 전화가 왔습니다. 기숙사학원이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벌써 학원이 싫어졌구나, 큰일났다 싶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내가 생각하던 그런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학원은 서울대학교를 나온 목사님께서 사명감을 갖고 운영하는 학교입니다. 돈벌이를 위해서 운영되는 기숙사학원이 아니라 청소년 선교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운영하는 학원입니다. 매일 저녁마다 기도회로 뜨겁게 찬양합니다. 목요일에는 2시간 이상씩 경배와 찬양으로 기도회를 갖습니다.

 

저도 기도회를 인도했었는데 얼마나 열정적이고 뜨겁던지요? 1시간 이상을 찬양해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뜨겁게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령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학생들이 바로 저런 뜨거움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기특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 학생들 사이에 우리 큰애가 함께 끼여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기숙사학원에서 혹시나 잘못된 길로 가면 어떨까? 염려를 했는데 기도회에 참석하고 나니 염려가 불식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열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풀 없는 모습으로 들려오는 전화선의 큰애의 음성은 그렇게 열심히 찬양하며 방언까지 하는 학생들이 평소에는 본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양면성이 왜 이렇게도 다를까? 그게 헷갈리고 고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아이에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이중성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양면 모두 그 아이의 참 모습이다, 재수생으로 그들은 무겁다, 기도회 때나 열광적으로 찬송하지 않으면 현실이 너무 힘들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면 너희들과 다름없는 본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을 이중 인격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들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정도를 말했던 것 같습니다.

 

큰애는 잘 이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친구들, 선배들의 양면성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큰애에게는 그렇게 타이르기는 했지만 정말로 교회 안에서는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하는 것 같은데 밖에 나가서는 영 다르게 행동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일수록 요란스럽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는 척 하는 거지요. 그래서 교회 선생님도 속고 부모님도 보기 좋게 속아넘어갑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행동입니다. 신앙양심을 속이는 것처럼 위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자기의 인격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3. 신앙생활 잘하는 청소년들의 좋은 방법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잠깐 살펴봅시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6절). 예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대상을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 중에서 지나치게 사람을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남학생에 잘 보이려고, 여학생들의 눈에 잘 보이도록 외모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돈을 투자합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일부러 큰소리로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으로 나가면서 “하나님 안녕!”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신앙 버릇이 있는 학생들입니다. 이중 인격성을 갖게됩니다. 성인(成人)이 되면서 자연히 교회를 떠납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5절). 바리새인들은 길거리 기도를 좋아했습니다. 길거리에 서서 큰소리로 자기의 선행을 자랑합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랑입니다. 원맨쇼를 하는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 대회의 최고 승자는 한국 국민들입니다. 질서정연하게 길거리응원을 했던 사람들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길거리응원은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신앙생활, 기도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월드컵 공동 개최국인 일본은 거리 응원이 아니라 방안에서 가족들끼리 조용히 텔레비전을 시청합니다. 오히려 기도생활은 일본 사람들의 축구 시청처럼 조용히 튀지 않게 해야합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기도생활을 과장하게 보여놓고 정작 기도 내용과는 정반대의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주변의 학생들에게 실망을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생활을 떠벌리지 마십시오. 우리 학생들은 선행은 많이 해야하지만 선행은 숨겨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믿음생활, 기도의 시간들, 선행들이 많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청소년들을 기뻐하십니다.

 

청소년 여러분, 공부도 지나치게 티를 내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공연히 외적으로만 티를 내지 말고 떠버리 식의 기도를 하지말고 마음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기를 바랍니다. 열심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을 내십시오!

뜨겁게 믿으십시오! 그러나 겉으로만 열심하는 척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살펴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하는 순수한 청소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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