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하신 일
요한복음 10:9~10
대학교 교수의 외동딸이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망했습니다. 아무리 달래고 얼러보아도 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딸을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교수는 울부짖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 딸을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게 만드는 당신은 신이십니까, 사람이십니까?”
예수가 어떤 분이기에 그리스도인은 예수께 자신의 삶을 의지하고 한번도 만나본적 없는 2천년 전의 그분을 위해 시간, 물질, 심지어 목숨도 맡길까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그분은 도대체 어떤 일을 하셨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청춘을 불사르고 그분에게 헌신해 왔을까요?
1.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없애십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의 뿌리에서 출발합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죄의 본성과 성향을 갖고 출생합니다. 본성(本性) 속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력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 죄를 없애보려고 인간은 종교도 만들고 부정도 해보고 별의별 행위를 다 했지만 죄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유리창 너머에 있는 티는 아무리 애쓰고 청소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죄는 죄가 없는 존재가 와서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문제는 죄가 없는 하늘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오셔야 했기에 동정녀의 몸이 필요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요구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들은 다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만 그 피는 효력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목적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죽음은 일찍 죽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한번도 인간답게 살아보지 못한 것이 이 젊은이의 비극입니다.”
그는 목적 없이 살다간 것입니다. 목적 없는 삶은 10년을 더 살았다거나, 덜 살았다에 의미가 없습니다. 목적 없이 10년을 더 살았다면 그는 목적 없는 삶을 10년을 연장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 참답게 사는 법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구원의 성취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목적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널리 실현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입니다. 목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목적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세상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계는 제대로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은 진정한 평화를 줄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 욕구불만, 좌절감, 경제문제, 자녀의 문제는 우리들을 늘 혼란스럽게 만들고 마음에 평안을 앗아갑니다.
그 어느 때부터 풍성한 삶을 누리면서 가장 정신질환이 많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의 소유가 우리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모든 특권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의지하였던 기둥이 하루아침에 스러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방으로 포위 당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모든 선한 것을 마련하여 주실지어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며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신다는 그 확증에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평안은 사실 환경과 별개입니다. 좋은 환경이 있어도 평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환경이 좋지 않아도 참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평안은, “일어난 일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일은 이 평화를 얻는 것을 뜻합니다.
4. 예수님은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힘있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살아있을 때보다 주님의 사후, 부활 이후에 제자 그룹은 훨씬 더 힘있고 용기 있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어째서 그 일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교훈과 규범을 본받으려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사건 이후, 그들은 예수님 자신에 주목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예수님이 그들 밖에 있었지만 부활 이후에 주님은 그들 안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는 확신은 그들의 연약한 삶을 하나님에게 연결하는 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죽음의 돌무덤까지도 열어버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 분의 힘은 우리의 힘이 될 것입니다. 그 분은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마 약속하셨습니다. 견디는 힘을 주시며 용서의 힘을 주시며 죽음으로 세상을 얻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과 터키팀을 스타로 만들고 폐막된 세계축구였습니다. 특히 한국팀은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16강에도 들지 못했던 대표팀이 폴란드, 미국, 포르트칼, 이탈리아, 스페인을 차례로 이겨가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4강은 결코 기적이 아닙니다. 선수들의 고된 훈련과 온 국민의 응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히딩크라는 감독의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특히 히딩크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한국 대표팀을 세계와 겨룰 수 있는 강팀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열광했던 응원단들은 히딩크를 잊겠지만 선수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히딩크가 그들에게 해 주었던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조무래기에 불과했던 그들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영으로 지금도 살아 역사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주님께 함께 생애를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주님께서 해주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믿을 때 주님께서 해 주신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행복을 전하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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