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 설교

[뜻을 정하다] 내면 가꾸기(요한복음 1:14, 15)

갈렙처럼 2025. 2. 10.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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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가꾸기

요한복음 1:14, 15

 

 

키 작은 사람이 목욕탕에서 눈을 감고 비누를 주우려다가 옆 사람 비누를 집어서 썼습니다. 그 비누의 주인은 체격이 좋은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뜸 반말로 소리 질렀습니다.

“야, 왜 남의 비누를 쓰는 거야?”

“죄송합니다. 눈을 감고 하다보니…, 용서하십시오.”

“뭐? 용서?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이 자식이!”

비누를 집어 쓴 나이 많은 사람은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다음부터 조심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체격이 좋은 젊은이가 먼저 나와서 옷을 입었습니다. 그는 근처 부대의 육군 중위였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도 나와서 옷을 입는데 그도 군인이었습니다. 계급장을 보니 육군 대령이었습니다. 체격이 좋은 육군 중위가 거수경례를 하며 외쳤습니다.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았다가 큰 코 다칠 뻔했던 이 우스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람은 외모로 취급받기 쉬운 것이며 그만큼 우리는 중요한 것들을 놓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1. 외모에 치중하기

외모로 사람 판단하기. 지금 우리 사회는 외모 중심의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취급하고 외적인 것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꾸만 외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지금 가장 잘되는 병원이 어떤 병원인지 알지요? 성형외과입니다. 미국 시사주간지<타임> 아시아판은 한국 성인 10명 중 1명은 성형수술을 한다는 특집을 게재했습니다. 40대 미만의 한국 여성 10명 중 7명은 외모가 인생을 좌우한다는 조사통계가 나왔습니다.

 

미국의 작가 노만 메일리는 “외모가 필요한 사람은 정치가와 프로 레슬러와 여배우밖에 없다” 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외모 가꾸기에 현안이 되어 있습니다.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여성적 본능은 어느 시대에든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인양 수술을 해가면서 외모를 가꾸려는 우리 시대는 뭔가 정신적 공허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외모 지향의 사회는 결국 한 나라의 정신문화를 황폐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너무 가볍고 얕은 시대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인류의 정신적 유산은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배척했습니다(11절).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고대하며 조상 대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메시아 민족이 정작 메시아가 왔을 때는 메시아를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은 외적인 메시아상(像)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상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다윗은 외모가 빼어나고 장군입니다. 다윗은 걸출한 영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을 빼 닮은 구세주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흠모할만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외모도 그렇고 출신도 그렇습니다. 30세가 되기까지에는 아무런 두각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로 그를 판단했고 자신들의 조건에 맞지 않았기에 영접치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이런 시각으로 대합니다.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얼마나 가졌는가? 그러니 자꾸 외모에만 치중하고 소유를 중심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외모가 초라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아주 왜소합니다. 그분이 부흥회를 가면 수종을 드는 전도사님을 보고 “목사님!” 하면서 인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외모로 평가받는 세상이기에 사람들은 외모에 치중하고 외모를 위한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외모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진실, 사랑을 버리고 외모로, 외적인 것을 기준으로 선택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점점 외면적인 것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니 높이 평가받기 위해 청소년들도 자꾸 외적인 것에 치중합니다.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외적인 것에 치장하느라 정말 공들여 가꾸어야 할 내면적 삶을 등한시합니다. 외적인 화려함만을 따라나섭니다. 사색하고 고민하면서 내면을 단장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겉껍데기만을 치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내모(內貌) 단장하기

우리 속담에 얼굴 예쁜 것보다 마음 예쁜 것이 더 예쁘고 마음 예쁜 것이 더 예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얼굴 예쁜 것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인은 보름달처럼 생긴 여인들-넉넉한 마음 소유자들을 선호했습니다. 현대여성들이 추구하는 미모-노랑머리, 쌍꺼풀, 늘씬한 다리는 아기 못 낳을 상으로 기피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에는 내모가 외모 위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참 실체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과 평화를 전하러 오신 인류의 스승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사후(死後), 그들은 부활을 목도함으로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스승은 단순한 위인이 아니라 독생자였습니다.

 

14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광이십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게 영광입니다. 지구와 같은 별들을 모래알처럼 많이 만드신 그분 앞에 무슨 말로 다 찬사를 올릴 수 있으며 그 영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인간 영웅에 불과합니다. 그는 별 하나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식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자식에게 반역을 당하여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울며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는 아이처럼 처신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였고 분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영광을 오직 구속 사역에만 사용했습니다. 백성들을 구속하고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일에만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외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내면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면을 단장하셨습니다. 그는 30년을 나사렛에서 자신의 내면을 단장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는 목수였지만 자신의 내면을 단장하는 목수였습니다. 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교권자들은 외적인 것에만 너무 치중하다 “외식자”(‘연극배우’ 라는 뜻이 있음)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외적인 것에 치중하는 이들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당장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인기가 있지만 그들은 업적을 남기지 못합니다. 내면을 단장하고 내면을 아름답게 꾸미는 사람이 결국은 큰 일을 하게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됩니다. 예수님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시선,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만 하나님께서는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내면을 단장하는 청소년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훌륭하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3. 당당하게 살기

예수님께서는 독생자였지만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형제들까지도 "당신이 메시아이면 기적을 통하여 그것을 증명해보시오"라고 했지만 그분은 그런 말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목수의 아들이라, 마리아의 아들이라, 목수 주제에… 운운해가며 비웃었지만 그는 당당했습니다. 그분은 독생자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외면을 치장하기에 바쁜 청소년들은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내면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이들은 당당함이 있습니다. 남들의 평가와 판단에 민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가에 항상 민감합니다.

 

조수미의 노래는 신이 내린 목소리라고 합니다. 노래방에서 자기 노래를 불렀더니 점수가 엉망이었습니다. 그녀가 평소에 노래를 못하였다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웃었습니다. 왜? 그녀는 실력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입니다. 그런 당당함이 그녀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지만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이런 영광이 있기에 세상의 영광에도 눈 돌리지 아니하고 당당합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는 가슴속에 진리를 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을 신문하는 베스도 총독 앞에서 “내가 매인 것만 제외하고는 당신도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당당함은 진리의 사도라는 확신감으로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역설, 당당함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빈 수레의 요란을 떨지 말아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외모가 아주 못생긴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굉장히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랍비의 명성을 듣고 로마 왕비가 만나기를 요청했습니다. 랍비를 만나고 보니 명성에 걸맞지 않게 못생겨도 유분수지 너무 못생겼어요.

 

왕녀가 혼자 소리로 탄식했습니다.

"뛰어난 총명이 너무 못생긴 그릇에 담겼구나!"

랍비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왕궁 안에 술이 있습니까?"

"있지요"

"어떤 그릇에 들어있습니까?"

"보통 항아리나 술병 같은 그릇에 들어있어요"

"황제가 마시는 술을 항아리에 담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당장 금 그릇에 담아서 황제에게 바치시오"

황제가 즐겨 마시는 술을 금 그릇에 담았더니 술맛이 완전히 가셔버렸습니다. 술맛을 본 황제가 노발대발했습니다.

 

왕비가 랍비에게 항의했습니다.

"왜 이런 짓을 시켰는가?"

"나는 단지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싸구려 항아리에 넣어두는 쪽이 더 좋을 경우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을 뿐이오."

아름다운 얼굴과 멋있는 육체 속에만 좋은 게 담기는 것은 아닙니다. 못생긴 그릇 속에 더 아름다운 영혼이 숨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이 내면을 보는 눈들이 있어야 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인 모세 멘델스존은 매우 키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곱사등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외모 때문에 늘 슬프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비극적으로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함부르크에 있는 한 상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모세 멘델스존은 프룸체라는 그 상인의 딸을 보는 순간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그 여성의 아름다움은 멘델스존에게 깊은 슬픔을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녀에게는 멘델스존의 기형적인 외모가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프룸체를 두고 떠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결혼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맺어주는 것임을 믿나요?”

프룸체는 돌아보지도 않고 차갑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당신도 그것을 믿나요?”

이 말에는 ‘우리 사이는 하나님께서 맺어준 일이 없기에 허튼 생각하지 말라ꡑ는 경멸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멘델스존도 그 의미를 알았지만 모른 척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장차 신부가 될 사람을 말해주지요. 내가 태어날 때에도 하나님은 그러셨습니다.”

“…?”

“하나님은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을 내 신부라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곱사등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외쳤습니다. ‘안 됩니다! 신이여, 사랑스런 내 여인이 곱사등이가 되는 것은 비극입니다. 차라리 나를 곱사등이로 만드시고 내 여인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는 곱사등이가 되었습니다.”

 

모세 멘델스존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때 등뒤에서 모세에게로 다가와 손을 잡는 이가 있었습니다. 프룸체였습니다. 훗날, 그녀는 모세 멘델스존의 아내가 되어 헌신적인 사랑을 했고, 그의 내조로 모세 멘델스존은 독일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손자 멘델스존의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아주 못생긴 소년이었습니다.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작은 회색 눈, 긴 팔다리를 비관하며 “나는 너무 못생겨서 도저히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을 거야”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자라면서 인생의 행복이 외모에 있지 않고 내면의 풍요로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른이 된 후에는 신앙의 가치가 참된 아름다움임을 알았습니다. 이 신념이 승화되어 아름다운 명작을 남겼으니 그의 이름은 톨스토이요. 그 명작은 <부활>입니다.

 

우리의 존귀함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숨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속에 하나님의 자비를 한없이 담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가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진실하심이 우리들 그릇 속에 가득 들어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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