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느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35~38절
서론
이번 주간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고난주간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그 목적지가 왕궁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옷을 깔아 꽃길을 만들더니 금세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성난 분노로 민심이 돌변합니다. 그래서 꽃길만을 기대했던 제자들이 골고다 길을 만나 배신하고 부인하고 도망갑니다. 우리 인생에서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인도한 곳은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 골고다 언덕,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33절,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골고다는 ‘해골’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 다메섹 문 북동쪽 230m 지점에 있는 약 20m 높이의 작은 언덕으로 추정됩니다. 예부터 처형 장소로 사용되어 해골이 많았거나 혹은 지형이 해골처럼 생긴 데서 골고다란 지명이 유래한 듯합니다. ‘갈보리’ 언덕이라고도 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38절, 가운데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양쪽에는 죄수들이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은 구원을 가르치는 구원론 교실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그래서 세 갈래 인생길, 죄수들은 세 부류 인간상(像)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재판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에게는 처형장을 내밀었고, 한 사람에게는 사면장을, 한 사람에게는, 삼일 후에 시상하는 표창장을 내밉니다.
왼쪽 십자가-은혜를 거절하는 이들에게 내미는 판결문입니다.
편의상 왼쪽강도라 합시다. 왼쪽강도는 십자가에서조차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했고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집(我執)의 십자가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44절, 예수님을 향해 욕합니다. 지금 십자가의 죄수들은 인생은 실패했지만 마지막 길에 동행하는 동료들입니다. 행위들은 악했지만 위로해야 할 불쌍한 루저(loser), 실패자들입니다. 손과 발은 못 박혔지만 남아있는 입으로 서로에게 좋은 말을 적선해야 그게 인간입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마지막 가는 길에 같이 갑시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마음대로 죄 지으며 살아왔습니다. 예수여, 나를 용서해 주소서”
형벌의 십자가에 달려 뜻밖에 만난 행운, 용서와 사랑을 받을 기회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의 입은 남을 조롱하고 비웃는, 죄를 짓는 추악한 혀가 되고 맙니다. 은혜를 구하지도 베풀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은혜를 뿌리친 자살골 입술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 종교는 자비를 말하고 선을 베풀면서 자력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스스로의 선한행위로 구원받는다! 이것은 한쪽강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불신’ 때문에 지옥행이 됩니다.
왼쪽 강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를 보여줍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거절했기에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발장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왼쪽 십자가, 자기 아집의 십자가에 달려 있는 인생입니까? 그것은 비은혜의 길입니다. 은혜를 받지도 않고 은혜로 대해주지도 않고… 그렇다면 지금 교회 안에서 비은혜의 십자가에 달려 종교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십자가를 바꿔 갈아타야 합니다. 비은혜를 버리고 은혜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구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른쪽 십자가-은혜로 구원 받은 자에게 주시는 사면장입니다.
(편의상) 오른쪽 강도도 죄인입니다. 십자가에 달릴 정도이니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누가복음은 ‘행악자’(눅 23:32)라고 합니다. 그 역시 다른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다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기도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모르고 있습니다!”
강도는 지금까지 그런 기도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평소에는 좋은 말씀 하다가도 극한 상황에 처하면 평소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위인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원수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시던 자신의 가르침대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스처가 아니라 진실이었습니다.
가슴이 콱! 메여왔습니다. 그 기도에는 자신의 조롱도 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 성령께서 그의 입을 여셨습니다. 그는 동료를 질책하고 예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입을 좀 닥치게!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여기서 죽지만 이 분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해 주소서”
지은 죄가 많지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 은혜의 손을 내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영접했고 예수의 나라를 희망했습니다. 그는 주님께로부터 확실한 구원의 사면장을 받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라!”
그는 이제 천국에 주소지를 얻었고 그 주소지로 떠나는 천국 백성이 됩니다. 이를 두고 루터는 갈라디아강해에서 ‘즐거운 교환’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義)가 교환되기에 즐거운 거래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즐거운 교환으로 그 분은 우리의 죄된 인격을 자신에게 입히시고 자신의 무죄하고 승리하시는 품격을 우리에게 허락하시었다. 이것을 입고 단장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십자가는 신비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터입니다. 이 교환은 손해를 보는 분이 있고 이익을 보는 자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항상 이익이 되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손해가 되는 거래이지만 십자가장터는 아름다운 교환,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독생자와 죄인이 서로 교환되는 곳입니다.
그의 의로움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주소지를 제대로 옮겼습니다. 예수라는 주소지로 옮겼습니다. 비록 현재의 주소지는 죄 투성이지만 그 죄는 예수의 십자가에 박아버리고 남은 생애와 내세는 은혜의 십자가로 옮겼습니다. 주님께서 의로움으로 부활하실 때 사면장을 받은 그 역시 의인의 신분이 됩니다. 의로운 주소지에서 영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른쪽 강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두 강도의 행위는 말 한마디만이 다를 뿐, 오십보백보입니다. 구원과 형벌로 가른 것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는 구원이 일어났고 은혜가 없는 곳에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밀고 나갔다가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공짜와 같은 구원을 보이심은 구원의 ‘요행’을 보이려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받게되는 믿음의 구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아들을 행악자들과 동류로 세웠던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도 넘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이제 은혜의 십자가로 주소지를 옮겨야 합니다. 죄의 대열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늘로 들어서야 합니다. 이웃들에게 은혜를 베풂으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죄의 사면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중앙의 십자가-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주시는 표창장입니다.
예수님은 강도 취급을 받으면서도 어떤 저항도 불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정하게 얼굴을 돌리셨지만 끝까지 신뢰합니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 끝까지 의지합니다. 믿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는 말합니다.
“해답을 가졌다는 것이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해답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예언, 약속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영혼을 맡겼던 것입니다. 왜요? 그래야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됩니다. 그래야 대속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은 대못에 박혀서가 아니라 구속자의 사명 때문이고 사랑 때문입니다. 원수들마저 품으려 했던 그 사랑이 나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욕 가운에서 견디게 한 것은 대못이 아니라 사랑의 못이 십자가에 달려있게 했습니다. 사랑의 못은 그 어떤 못보다 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가운데 십자가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십자가입니다. 형통할 때, 즉시로 기도 응답되면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사가 흐트러지고 기도 응답은 오지 않고 갈수록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그런 십자가 꼭대기 위에서 주시는 표창장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일부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3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더 엄청난 상급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참고 기다리는 이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표창장입니다. 그 십자가에서의 표창을 위해 우리는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론
“나는 지금 어느 십자가에 있을까?”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중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으로는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에 달려있으면서 육신으로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십자가에 달려있는 행색입니다. 믿음으로 주소지를 옮겼으면서도 아직도 내 본성의 주소지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오른쪽 강도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구원받은 강도는 이런 면에서 아쉽습니다. 구원을 받은 내가 어떻게 살까? 그런 고민이 없이 천국에 간 것은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구원이 될 수도 있는, 그의 비극일 것입니다.
그런데요, 문득 누군가가 생각납니다. 가운데 십자가에 있어야 할 사람 말입니다. 누구일까요? 가운데 십자가는 원래 예수님의 몫이 아닙니다. 바라바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박히시고 바라바는 살아난 것입니다. 지금 바라바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라바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씀 하실까요?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죽는다! 이 모습들을 감사히 받아라! 사람답게 살다 오거라!”
그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죽음을 미안해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라! 그리고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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