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훈 저서 모음/[신수성가]

[神手成家2] 요셉에게 길을 묻다(2)

갈렙처럼 2025. 3. 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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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手成家 1]

요셉에게 길을 묻다(2)

예수, 제대로 믿어보자

 

 

이런 시대에 우리는 요셉을 불러내야 한다. 요셉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총으로 신앙생활만 아니라 생활신앙도 되어야 한다. 마음씀씀이도 좀 다르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식당에서 내가 먹었던 자리, 앉았던 자리는 탁자도 의자도 정돈하고, 여러 사람이 있는 공공장소에는 크게 떠들지 말고, 운전할 때는 매너가 있고 목욕탕에서는 남의 물건이지만 내 것처럼 아껴 쓰는 남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신앙은 유식한척 하면서 생활은 무식하게 행동한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청소년들이 말다툼을 하는데 누가 쟤네들 교회 다니는가봐라는 말을 했단다. 과장된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조크가 나왔다는 자체가 마음이 불편하다. 말을 잘 하면 너 교회에 다니니? 라든 시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나쁜 사건이 터지면 교회에 다니는가, 를 묻는다. <밀양> <도가니> 같은 영화의 흥행이 주는 영향이 크다. 내가 너무 자학적(自虐的)인 말을 쓰고 있는가?

 

크리스천 청년들은 대부분 배우자를 선택할 때 신앙부터 먼저 보겠다고 말은 한다. 그래야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결혼 적령기가 멀리 있을수록 진심으로 그렇게도 생각한다.

 

계간 SNS 잡지 <랭킹> 가을호가 크리스천의 결혼관을 설문조사한 결과 남성 50%는 배우자의 신앙심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이어 마음씨(18.75%), 외모(15%) 순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조금 높은 56.65%가 신앙심을 1위로 들었다. 2위 마음씨(21.03%), 3위 능력(9.01%)이다. 남성은 여자의 능력보다 외모를 따지는 반면 여성은 외모보다 남성의 능력을 고려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렇게 설문조사에 응답하던 청년들도 정작 결혼대상자가 나타나면 신앙보다는 외모나 능력을 택한다. 우리 믿음이 상당히 현실과 유리된 가상현실의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크리스천들이 세상과 다른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에 겉만 신앙으로 포장되면서 이중적인 태도가 나오고 주변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위장이 아니라 훈련이 안되어서 그런데 세상의 눈에는 위선으로 보인다.

 

서울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한 이정근 목사가 <뭐야, 예수 믿는다구? 어떤 인간머리가 되어가나 두고 보자> 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을 썼다.

 

예수님을 믿으면 좋아진다는 말일까? 아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고집쟁이 뻔돌이 뻔순이들로 변한다는 뉘앙스의 제목이다. 같은 신앙인들조차 서로의 행동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 때문에 좀 헷갈린다. 성경은 너무 잘 아는데 갈수록 고집스럽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이기주의자가 된다. 찬양은 뜨거운데 생활에 영성이 없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더 질투하고 불평을 전세내고 남의 말을 해댄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목사가 헷갈리니 비신자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신앙과 신앙생활을 다루고 싶어서 요셉을 불러낸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를 향한 변명

이야기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지만 사실은 한국교회를 보호하려는 본능으로 이 글을 쓴다. 불쌍한 우리 한국교회. 나는 공개석상에서 대놓고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에 문제가 터져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텔레비전에 나와 한국교회를 흉보는 전문 비판가들이 있다. 말로는 교회개혁이고 한국교회 자정(自淨)이라면서 툭툭 던지는 말들은 기자들이 한국교회를 공격하기에 좋은 내용들만 골라서 한다. 한국교회가 어려움에 빠져있는 상황에서는 흠집 내는 일은 삼갈 줄 아는 지혜 혹은 미덕도 있어야 한다.

 

목회자 수련회에서 어느 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기독교계 명문대 교목이 학생들에게 종교를 물었습니다. 천주교, 불교 학생들은 손을 번쩍 드는데, 교회 다니는 학생들은 쭈뼛쭈뼛했답니다.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 창피해서'랍니다."

 

이런 말은 공적(公的)인 자리에서 할 말도 아니고, 동의할 수도 없다.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 창피해서 손을 들지 못했다고? 일간지는 제목을 "믿음 있는 청년도 교회 멀리해로 뽑았다. 맞는 말일까? 물론 이런 청년들이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청년이라면 그렇게 처신하지 않는다. 처신했어도 소수이다. 소수를 갖고 다수를 대변하는 것처럼 과장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한국교회 청년들이 교회에 대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는 줄로 안다. 신문에 나와 있는 그 한 마디로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추락함을 모두 명심해야 한다.

 

우리끼리 할 이야기를 왜 세상에 대고 하는지도 궁금하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말들은 일반기자들이 몰려있는 자리에서 할 발표는 아니다. 아니면 자기들 단체의 활약을 알리려고 보도 자료를 신문사에 보낸 것은 아닌지. 긍정보다는 부정적 기사를 확대보도하는 기자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들이 왜 자꾸 비판적인 기삿거리를 제공하는지. 묻고 싶다.

 

별세하신 하용조 목사는 암()으로 투병하며 5년째 주 3회를 투석하는 아픔 중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오늘의 위기를 특정 교회, 특정인에게 돌리려는 것은 무책임하기까지 합니다. 가정, 교육, 캠퍼스, 사회가 죽어가고 있는데 네 탓이다’ ‘난 괜찮다는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겠습니까. 기복주의만큼 나쁜 게 무조건적인 비판입니다.

 

교회역사를 볼 때 비판만으로 그 시대를 치유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지금은 아픈 환부를 도려내되 탈이 나지 않도록 잘 싸매고 새 살이 돋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 혼돈을 치유할 때입니다.”

 

옳은 말씀이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한국교회의 환부(患部)를 도려낸다고 하면서 오히려 더 덫을 나게 하는 직업군 개혁자들로 한국교회는 심한 자학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저들은 유명세를 타는데 정작 한국교회는 엄청난 아픔을 당하고 있다. 병이 들어 아파하고 두려워하고 때로는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 숨고 싶은데 이곳저곳 환자들을 찾아다니느라 기웃거리면서 상처를 위로하고 낫게 해 줄 생각은 않고 병에 걸렸다고 비난하며 외쳐대니 설령 내 잘못으로 병이 왔다 해도 그런 사람들이 참 야속하다.

 

이제는 비판을 해도 교회 내에서 할 일이다. 일반 언론, 안티언론들이 쌍심지를 켜고 한국교회의 잘못을 캐고 다니는 이런 시점에 내 이름이나 단체 활약상을 홍보하려고 한국교회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세상에 대고 어머니 같은 교회를 공격해서야 되겠는가?

 

다른 때는 비판을 해도 지금은 한국교회가 비판받을 대로, 오해를 받을 대로, 공격받을 대로 공격당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를 잘못하면 열개를 공격하고 우리가 10개를 잘못하면 100개를 공격한다. 우리가 열개를 잘해도 하나만 잘했다 하고 100개를 잘해도 10개만 칭찬해주는 불편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야말로 지금 한국교회는 시대와의 불화이다.

 

이런 때는 한국교회 우리만이라도 서로 위로하면서 괜찮다, 이제 이런저런 잘못을 버리고 반성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일어서게 하실 것이라고, 한국교회는 대단한 교회이고 앞으로도 더 대단한 교회로 나아갈 것이라는 말로 우리끼리라도 위로하면서 격려하면서 응원하면서 나가야 한다.

나의 사랑 한국 교회

한국교회는 우리가 아끼고 내가 사랑해야 할 교회이다. 다시 보듬어야 할 교회이다. 야단맞을 대로 맞은 아이에게는 격려가 필요하다. 보듬어주는 손길이 필요하다. 지금은 준엄하게 비판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제사장의 중보사역이 더 필요한 시대이다. 독재 권력의 시대에 세상이 무서워서 입을 다물 때 교회는 선지자 사명으로 입을 열어야 했지만 이제는 너도나도 마음껏 비판하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는 교회는 제사장 신분으로 돌아가 교회와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교회가 할 일이다.

 

아하, 비판을 직업으로 삼으며 한국교회를 흉보고 다니는 개혁직업꾼들을 흉보면서 나 역시 그런 분들을 흉보는 우()를 범하고 있으니뭔가 진실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요셉을 생각한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유년의 가정, 이복형제들, 자기를 힘들게 했던 악연(惡緣)의 인생들요셉은 모두를 품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제를 배신하는 썩은 집안을 개혁한다고 뒤집어놓지 않았다. 기다렸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며 간섭하실 때까지 기다렸다. 어떤 부당한 경우에도 오해를 받으면서도 경건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를 견지했다. 신수성가의 생애를 살아낸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거의 4천여 년 전 고대 근동에서 살았던 그 요셉을 불러낸다. 그 요셉에게 길을 묻는다. 이제 한국교회는 요셉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1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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