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전원
이사야 42:10-13
중동에 모나코라는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유명했던 여배우 켈리가 왕비가 되어 유명해진 나라인데 사실은 유명해야 할 이유가 더 있습니다. 모나코 국립교향악단의 단원 수는 85명입니다. 모나코 국군의 수가 82명이랍니다. 한 교향악단의 인원이 그 나라 육․해․공군 전부를 합친 수효보다 많다는 사실은 얼마나 모나코가 평화스러운 나라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좀 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어떨찌...)
우리는 금년에도 찬양하는 청소년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두들 성가대가 아니더라도 성가대의 마음으로 뜨겁게 찬양하는 일에 자신들을 드려야 합니다.
새 천년은 경배와 찬양이 강하게 역사 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1. 찬송이 목적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창조하셨고 주님의 교회로 불러주셨을까요? 인생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이사야 43:21).
우리를 왜 창조하셨다고요? 찬송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 청소년들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을 놓쳤습니다. 성경에서 죄를 "하말티아"라 하는 데 이는 목표물을 놓친 것을 뜻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만물 창조, 인간 구원, 사랑, 새 예루살렘을 찬송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 인간의 찬양의 목표를 상실시켜버렸습니다.
악기는 가인의 자손 유발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인간의 첫 노래는 가인의 자손 라멕에 의해 시작됩니다.
"아다여 실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창상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77배로다."
이 노래를 분석해 보면, 그 중심은 인간 라멕입니다. 라멕이 한 일, 그것도 "창상"을 노래합니다. 그의 노래는 복수요 증오요 피 흘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노래를 주셨을 때의 그 목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노래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찬양하고 피 흘림을 독려하고 증오심을 심어주는 노래가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단을 숭배하며 찬양하는 노래까지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8절에, 하나님은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찬송을 우상에게 주어버린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 크게 찬송을 부르고 애창하고 사랑함으로 사단에게 우상에게 빼앗긴 찬양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찬양을 우상에게 봉헌한다면 우리는 허무함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솔로몬이 우리에게 경고해 줍니다. 그의 노래는 상당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여러 아내들의 신에게 그 찬양을 빼앗김으로 그는 '전도서'를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를 뒤따라서는 안됩니다.
2. 찬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전원입니다.
찬양은 일찍부터 존재해 옵니다.
구약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성가대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일찍 성가대를 조직해서 운영해 왔습니다. 성가대는 한 교회의 성가만을 지켜오고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영적 찬양을 선도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도록 선전하는 선전원 역할을 했습니다.
바로 청소년 여러분들이 세상에 찬양을 널리 퍼뜨릴 선전원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2절, "찬송을 선전할지어다."
선전원. 영화 선전원, 약 선전원. 그들은 월급을 위해 하기도 하지만 진짜 선전원은 거기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선전원입니다. 무엇을?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그러므로 찬송이 되려면 여러분들은 남들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의 삶을 살피시며 도우시며 힘을 주시는 하나님, 악한 자들을 벌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날마다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에게 우리의 순결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힘있는 찬양, 거룩한 찬양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찬양하는 학생들이 찬양을 한다고 하면서 성경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찬송의 입술이 성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찬양에 영성이 없습니다. 노래에는 그 사람의 혼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중세시대에 남성 소프라노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고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성들도 내지 못하는 아름다운 미성의 노래를 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거세된 남자들입니다. 남자들이 변성기를 통과하며 성대가 굵어질까 봐 아주 어려서부터 거세를 시켰습니다.
거세된 남자들의 고성(高聲)은 그들의 슬픔이고 눈물이고 한(恨)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세당한 자신들의 신세가 서러웠고 하나님에게 자신들의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그들의 음성에는 혼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찬송이건 소리이건 음악이건 남들을 감동시키려면 소리 속에 내 마음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야 합니다. 건성으로 하는 찬송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아버지는 맹인 수양딸 송화다 소리꾼으로 대성(大成)하기를 바랍니다. 수양아버지는 소리꾼으로서의 대성을 위해 송화의 눈을 맹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소리를 위해 딸의 인생을 망치는 무정한 아버지인가요, 아니면 예술을 위해서 인간의 욕망을 끊고자 했던 위대한 스승인가요? 그래도 송화의 소리는 힘이 넘치지 않습니다. 하도 답답한 아버지는 송화를 붙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목소리는 예쁘기만 할 뿐이다. 혼이 들어있지 않다.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맹인이 되었으면 한이 있을 텐데 왜 너의 목소리에는 한이 없느냐? 한이 들어있는 소리를 해야한다. 한! 한!“
위대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깊은 산 속에 은둔한 채 여생을 보내는 음악가였습니다. 노 음악가의 제자가 되고 싶어 수많은 지망생들이 찾아왔습니다. 노인은 문전에서 모두 쫓아내 버렸다. 한 젊은 음악가가 며칠이고 찾아왔습니다. 제발 자기 연주를 한번만 들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노 음악가가 허락하자 청년은 연주를 했다. 나무랄 것 없는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연주를 들은 노 음악가가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자네의 연주는 좋았어. 그 정도면 밥벌이는 하겠어. 그러나 위대한 음악가는 될 수 없을 거야. 자네의 음악에는 혼이 들어있지 않아."
요즈음 젊은 가수들은 음악보다는 기교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무대나 화면에 나가서 현란한 의상과 몸짓으로 춤추며 율동하는 것으로 인기를 얻어갑니다. 그러다 보니 ‘립싱크’가 대부분입니다. 립싱크, 입맛 뻥긋거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도 그런 찬양이 아닙니까? 노래방에 가서는 정열을 다하여. 목이 터지라고 노래하면서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금붕어처럼 입맛 뻥긋! 거리는 청소년들은 아닙니까? 우리의 찬양이 립싱크가 되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찬양이 재미생활, 취미생활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찬양이어야 하고 개인들의 희로애락이 그 속에 담겨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배기 서편제가 나오듯이 진짜배기 찬양이 나올 것입니다.
3. 찬양은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옛날부터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크다고 해 왔습니다. 성경에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크다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왔습니다.이에 비해 찬양의 힘은 덜 강조해 왔습니다. 찬양은 단지 하나님께 찬양하여 마음이 기쁘고 명랑해지는 것으로만 알아 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찬양의 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찬양은 능력이요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는 무기로 나옵니다.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조직하여 찬양할 때 적들이 퇴각했습니다.다윗은 수금으로 악신 물리쳤습니다.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 기도와 찬양할 때 옥문이 열렸습니다.본문은 뭐라고 합니까?찬양하라고 합니다. 항해하는 자, 선원들, 섬들, 거민들, 성읍들, 촌락들, 광야, 땅 끝… 소리를 높이며 찬양하면? 12절.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전사 같이 나가셔서 대적을 크게 치신다고 하셨습니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며 찬양의 힘을 응원 삼아 하나님은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이 살아있으면 학생회가 살아있는 것이요, 찬양이 힘이 있으면 그 학생회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찬양이 부흥하면 그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신다고 시편은 말하고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은 힘있게 됩니다.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공부운동이 일어나던 시대가 있습니다. 기도에 열심하여 학생들이 기도원에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방언을 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경배와 찬양의 시대입니다. 교회마다 청소년들의 찬양과 경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CCM 찬양들이 인기를 얻고 어떤 가수의 CCM은 백만 장도 더 팔렸다고 합니다.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교회마다, 학생회마다 새로운 부흥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독일 아이스레벤 성당. 성가대가 연습을 하고 있는 데 문밖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늘지만 고운 음성이었습니다. 지휘자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열 두 세 살쯤 되는 소년이 성당 안을 들여다보며 노래 부르고 있었습니다.
“뭐 하는 거냐?”
“성가대원이 되고 싶어 지휘자 선생님이 들어주셨으면 해서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성가대는 어른뿐인데?”
“예수님이 써 주시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이름이 뭐냐?”
“네, 마르틴 루터입니다.”
가늘고 고운 목소리를 가졌던 소년, 예수님이 써 주시면 무엇이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청결한 아이 마르틴 루터를 통하여 하나님은 어둡고 타락했던 중세교회에 개혁의 기치를 들게 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30년 후에 그 고운 목소리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하면서 로마 교황청에 대항할 줄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을 상대로 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찬송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찬송을 불렀고 직접 찬송을 만들어서 동조자들과 함께 부르면서 새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찬송이 주는 힘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금년 한 해는 내가 즐거워서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선전원이 되어드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 하는 살아있는 찬양의 학생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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